31 “여긴 왜 이렇게 시커멓기만 한 걸까? 죄다 타버렸는지도 몰라! 사실 우린, 잿더미 위를 걷고 있는 거지.”
‘속이 타들어 가는 무언가…….’
결국엔 짜증이 나서, 다시 티격태격 싸우고.
“제발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이건 그냥 아스팔트라고! 탄내도 안 나고, 딱딱하잖아! 재도 발에 안 묻는다고!”
“아스팔트도 태워서 만드는 건데…….”
“하!”
넘어가고, 다시 화나고 마는 거야.
‘아니, 쟤 말이 맞잖아!?’
32 하지만 셋째 날, 난 녀석에게 정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침묵을 이용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지.
(중략)
성공이었어. 네 기가 좀 죽은 게, 이렇게 행복하다니! 소음 없이 그저 걸을 수 있다니!
33. 이를테면, 암컷과 수컷, 남성과 여성, 성과 섹스, 성 소수자, 간성의 존재, 무성의 존재, 양성의 존재, 결국 모두가 규정할 수 없는 자연적 존재, 자연과 인간, 사회와 탈 사회, 사회 속에 권력, 당연한 것과 인위, 인위를 악용한 조작, 조작에 부여된 정당성, 정당성에 의한 폭력, 약자의 고통, 약자 개념의 무수한 상대화, 상대화로 더 복잡하게 만들어지는 권력관계, 무한 영속 사회, 무한 경쟁사회, 소소한 분쟁의 과부, 사회에 의한 인간의 필연적 비굴함, 결국은 불행한 의미의 인간.
34 난 그냥, 혼자 걸어갔어. 분명 익숙한 일이야. 혼자, 소리 없이 잠에서 깨고, 별 겉치레나 준비 없이, 그냥 가던 길을 가는 생활 말이야. 지평선 너머로 점점 쪼그라드는 네 모습만 빼면, 여느 때랑 똑같았어. 네 조그매진 크기만큼이나마, 마음이 불편할지도 모를 일이었는데, 전혀 그러지도 않았어!
‘지도 집이 있는데, 돌아가서 하던 일이나 하겠지. 애초에 계속 걸을 수 있는 녀석이 아니야. 발에 굳은살도 안 박였을걸?’
근데, 저녁노을 반대편에서
“푸른아!!!!”
뒤돌아본 곳에 넌, 분명 손을 흔들며 달려오고 있어. 데자뷰? 아! 너랑 처음 본 아침에도 이랬었지. 그날처럼 가까워지는 네게 미안하게도, 난 다르게 행동하기로, 나쁜 마음을 먹어버린 거 같아. 어떤 대화도 싫어. 그냥 막 이상한 화가 나고, 그게 나보고 그러라고 시키고 있어.
35 가끔 이럴 때가 있어. ‘나? 내가 누구였지?’
36 생각해 보면, 정말 얼마 만에 웃어본 걸까? 내가 웃는 법을 기억할 수 있긴 했구나. 이 좋은 걸, 왜 잊고 살게 될까?
37 처음에 난, 그녀가 항상 빠르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그런 게 아니야. 그녀에겐 한 치의 망설임도 느껴지지 않아. 남을 신경 쓰지 않는 것 이상의 빠르기로, 자신을 스스럼없이 드러내고 있어. 맞아! 아마 그녀는 ‘하고 싶은 것을 한다.’라는 자신의 법칙을 가지고 있는 거야! 수많은 법칙이 그러하듯, 그것은 그녀와 상대에게 갑자기 들쑤시며 나타나는 거야. 하고 싶은 것이, 행동을 통해 그대로 나타나는 유형인 거지! 그 너무나 자연스러운 흐름과 대담함에 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아······. 그리고 꽤 재미있다고 느끼고 있어.
(중략)
확실히 얜 생기가 잘 안 죽는 타입이야. 언제나 명랑함이 묻어나는 그런 친구······.
38 세상은 단순하지만, 복잡한 것의 연속.
(중략)
맞아. 방금 지은 것 치곤 괜찮지? 이거 진짜 내가 한 말이야? 너무 이상하잖아!
39 “무슨 얘기지?”
“당연히 네가 이 연약한 아이를 방치하고 있다는 말이야. 설마, 남들도 너처럼 발이 곰 딱지인 줄 아는 거냐?”
“…….”
“힉?! 설~~마…….”
40 넌 온종일 싱글거렸어. 오히려 말을 아끼고 있었지. 조금 줄어든, 연고 케이스를 볼 때마다, 야릇한 흐뭇함을 느끼는 걸 숨기지도 않았고. 지금 너, 며칠간 고대한 택배를 받은 사람 같아. 왜? 참 웃기다, 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