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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되는 종말론

물론 종말은 숙명이지만, 종말론은 다른 의미로 사용하는 것 같아. 종말론은 아주 예전부터 있었대. 마야인의 시대까지 넘어간다나. 그런 옛사람들도 끝이 온다는 두려움을 가졌다는 건, 사실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닌 거지.


아득한 옛날에 예언한 시기가 왔을 때, 사람들은 괜히 들썩이나 봐. <서프라이즈>라는 두렵고도 웃긴 프로그램이 생각나는 대목이야. 영화 <2012>를 처음 봤을 때, 이미 2014년이었지만, 괜히 무서웠던 것처럼. 어머니가 1999년에 태어난 동생에게 미안해했던, 새천년의 초읽기처럼.


생각이 여기까지 왔을 때, 난 종말론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하나의 의식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어. 끝없이 계속되는 종말론이 가끔 죽음을 두려워하게 되는, 사람의 생애와 닮아있단 생각을 했거든.


고리타분하지만, 분명 종말과 종말에 대한 두려움은 다른 거야. 죽음도 마찬가지고. 종말이나 죽음이란, 하나의 현상에 지나지 않아. 정말로 모든 게 끝나버리는 거와는 거리가 있지. 하지만 한 개체의 입장에선, 그만한 의미가 있는 현상이야.


고로, 죽음이나 종말을 두려워하는 것도 당연한 거야. 본능이라 불러도 될 정도지. 당장에 자신이 없는 내일을 상상하면, 어지러운 법인걸. 각자가 그걸 두려워하는 이유나 방식은 다르지만, 그걸 진심으로 반기는 존재는 정말 몇 안 될 거야.


종말론은 그런 본능을 이용하는 것 같아서, 짜증이 난단 말이야. 정말 기분 나쁜 선전 거리야. 물론, 개인적인 느낌일 뿐이지만.


그래서 좀 더 논리적인 느낌으로 종말론을 깔 수 있는 수단을 물색했어. 다들 감정적으로 주장을 만들어내는 법이니까, 상관없겠지. 난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에 주목하기로 했어. 순수하게 생애가 끝나는 두려움을 제거하면, 뭐가 남아있을까? 분명 그 한심한 종말론이 계속되는 이유가 따로 있을 거거든.


힌트는 있었어. 마침 이런 생각을 할 때, 마블의 영화가 다시없을 황금기를 걷고 있었거든. 덕분에 난 사람들이 영웅을 좋아하는 이유도 생각할 수 있었어. 그러다 종말론이든 영웅물이든, 전 지구적인 문제에 대한 두려움을 다룬다는 걸 발견했지. 두 장르가 생각보다 훨씬 거대하고 두루뭉술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거야.


영웅물에 대한 내 솔직한 감상은 이래. 지구를 구하는 내용의 콘텐츠를 수없이 찍어내는 걸 보면, 사람들은 자신들이 세상을 구할 수 없다는 걸, 거의 확신한 거라고 말이야. 한창 자신 있을 땐, ‘영웅물은 만인의 딸감’이라는 표현도 사용했지. 그야, 사람들은 자신이 이룰 수 없는 것을 콘텐츠로 소비하는 거잖아? 아주 사소한 것부터 속속들이 말이야.


계속되는 종말론은 그런 감수성과 관련이 있다고 봐. 물론 처음부터 그렇다는 건 아니야. 마야인에게 그건, 하나의 절대적인 믿음이자, 정체성이었겠지. 하지만, 그걸 계속해서 소비하는 지금은, 명백히 달라. 인간이 발견한 거의 모든 이론도 그렇고 말이야…….


종말론이 계속되는 건, 일종의 비겁한 속죄의식이야. 세상의 빠른 파멸을 막을 길이 없다는 걸, 순순히 인정하기 싫은 거지. 이 무슨, 모순적인 말일까! 다 같이 먹어 치운 케이크를, ‘얘가 먹자고 했다’하는 것과 같은 거지.


증명 과정이 과학적인 여부와 상관없이, 인간이 자연을 뒤엎은 건, 명백한 사실이야. 한계적으로, 누구도 이만큼 빠른 변화를 본 적 없기에, 정확하게 계산하려는 사이에, 이미 따라잡을 수 없는 새로운 변수를 방치하게 되는 거야. 덕분에 누구도 이 길이 어디로 돌진하는 루트인지 증명할 수 없지만, 더 쉽게 쌓이는 데이터 쪽으로, 관심이 기울 수밖에 없는 거지.


당연히 자연의 급격한 변화 데이터가 쉽게 쌓이기 마련이야. 현실적으로 이 프레임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키워드(기술 발전)가 너무 전문적이고 희망 원 툴인데, 전자는 너무 쉽게 자극적인 관심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지.


정답을 알 수 없다는 것 이외에 가장 큰 문제는, 최소한의 검증도 거치지 않은 가짜 뉴스들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얻을 수 있는 이득에 편승한다는 거야. 난 그중 하나가 계속되는 종말론이라 생각하는 거고.


누구도 종말론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아. 그걸 믿든 안 믿든, 생명은 죽음을 가정하면서 살아가지 않으니까. 다만 우린, 어느 시대보다 종말의 실질적인 냄새를 맡고 있다는 거지. 그 냄새가 어떤 놈인지 모를 일이지만, 분명한 건, 인간이 자초한 냄새란 말이야. 잘살고 있는데, 괜히 뭔가 켕기는 덩어리가 생긴 것 같아. 누구도 직접 감당할 수 없어서, 언제나처럼 제도와 정치와 기술에 맡겨버릴, 그런 문제 말이야.


그런 덩어리를 받아들인 것처럼 행동할 수 있다면, 정말 마음 편한 일이야. 우리의 관심은 정말로 어떤 걸 깨닫는 게 아니라, 당당하게 행동할 수 있는 핑계 쪽에 기울어져 있으니까. 계속되는 종말론의 정체란 그런 거야. 요즘은 이런 걸 정신승리라고 하는 거 같아.


다만 내가, 이렇게나 폄하하고 혐오하는 종말론 얘기를 계속하는 이유는, 좀 안타깝기 때문이야. 종말론이 두려운 건 알겠지만, 그 모든 것에 쿨할 수는 없는 걸까? 어떤 결과가 기다리든, 우리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수는 없는 걸까?


종말론을 받아들이는 심리의 소용돌이도 재밌지만, 그걸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으면 더 좋을 거 같아. 당장에 종말 여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죽으면 그거뿐인 건데, 뭐 고민할 거리가 있을까? 사회가 죽어도 살아남을 사람들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이미 그건 고민거리가 아니라, 잔혹한 생존일 뿐이야. 무언가가 살다가 죽는 건, 그런 거야. 결과적으론 잘못된 행동이 많은 법이고, 나중에 후회하는 건 의미 없을뿐더러, 모든 행동이 최선을 최대한 실현해 본 시도들인 걸. 그런 거 없이 영원히 존재하는 건, 아무런 가치도 재미도 없는 일이야. (그래서 내가 절대자인 신을 싫어해)


모두가 알고 있듯, 모두 죽기 마련이야. 종말론은 장례식처럼, 우리의 문명도 언젠가 죽음을 맞이할 거라는 숙명을 확인하는 정도의 역할로 충분한 거 같아. 어떤 결과가 기다리든, 사람들이 초연할 수 있으면 좋겠어. 정말 이상적인 생각이지만, 난 인류가 일군 품위가 그 정도는 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생각하거든. 물론 당장 내일 죽는다면, 난 울며불며 난리법석을 떨거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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