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한, 화도 낼 수 없다.
무조건적인 사랑과 희망, 행복의 색이라서 뿐만이 아니라 - 수줍게 물든 순진무구한 색 앞에 서면 머리 끝까지 치솟았던 분노가 그렇게 큰 문제였나, 싶어지는 것이다.
알렉산더 샤우스는 분홍이 가진 진정의 효과를 교도소 실험으로 밝혀냈다. 미해군 교도소 수감실을 달콤한 분홍색으로 칠한 후 폭력 성향을 보이는 수감자들의 행동 변화를 관찰했다. 그 결과 문제 발생이 0건으로 줄어들었단다. 이 역사적인 분홍은 그 효과성을 인정받아 [베이커 밀러 핑크]라는 이름까지 얻었다.
유치원에만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분홍의 놀라운 영역확장이다.
국가 재난 사태가 발생할 경우 미술치료분야에서 1순위 자문 대상인 김선현 교수님의 저서 [그림의힘] 에서도 분홍은 '무조건적인 행복의 색'으로 표현된다. 핑크가 사용된 그림이 여럿 있지만 오늘은 애벗 그레이브스가 뱅크 오브 아메리카의 컬렉션 작품으로 그린 '종잣돈'(The nest egg)이 와닿는다.
은행에서 첫 통장을 받아든 신혼부부의 설레임이 시간과 거리의 한계를 뚫고 2020년 서울의 작은 공방에까지 느껴진다. 부부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이걸로 언제 대출금 갚고 애 키워, 어휴 큰일이네.'
'그러게 연애할 때 싹싹 모으지 뭐했어 대체.'
확실히 이런 대화를 하는 분위기는 아니다. 오히려 장밋빛 꿈을 나누고 있을 확률이 높다. 한 푼 두 푼 착실히 모아서 알콩달콩 만들어갈 미래에 대한 환상.
'벌써 이만큼이나 모았네, 자기가 매일 도시락 싸준 덕분이야.'
'덕분에 반찬 솜씨 완전 늘었는걸 뭐. 아, 완전 뿌듯하다!'
대충 이 비슷한 이야기를 주고 받지 않을까.
두 사람의 볼은 한껏 상기되어 있다. 여자의 드레스에 반사된 것이 아니라면, 분명 둘의 대화에서 피어난 즐거운 상상이 열을 올렸으리라. 희망과 기대는 그렇게 분홍빛으로 우리의 마음과, 볼을 물들인다.
여기, 기대를 담은 또 하나의 명화가 있다.
19세기 영국에서 활동했던 법률가 출신의 화가, 로렌스 알마 타데마의 아름다운 그림이다. 몽환적인 색채와 섬세한 직물 표현에 놀라며 여자의 시선을 따라가다보면, 분홍빛 꽃송이와 마주치게 된다.
그녀는 분명 꽃과, 꽃 너머의 지평선을 바라보고 있다.
불안함이나 걱정은 전혀 없는 모습으로,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 하다.
기대와 걱정은 둘 다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개인의 반응이다.
불길한 기분으로 내일을 바라보면 노심초사 걱정이 되고,
좋은 일이 생길거라는 마음으로 살면 매일 기대감에 눈을 뜬다.
그녀는 멀리 떠난 애인을 기다리는 중일수도 있고,
얼마 전 주문한 새 드레스를 기다릴 수도 있다.
두 경우 모두, 애인이 잠적했거나 드레스를 실은 배가 좌초하는 불행의 시나리오를 그려볼 법 하다.
하지만 그림 속 여자는 살면서 한 번도 불운을 겪어본 적 없는 듯, 유유자적하게 다가올 내일을 응시한다.
오려던 불행도 '어, 이러면 재미 없는데' 하며 도망갈 자세다.
코로나19로 대한민국이 아니, 전 세계가 위축되어있다.
직장인은 직장인대로, 취준생은 취준생대로, 자영업자는 자영업자대로 각자의 미래를 두려워한다.
오늘 아침 7시부터 관련 서류를 모두 준비해놓고 소상공인 지원 대상 확인서를 온라인으로 발급받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는데 30초만에 접수가 마감되더라. 눈 깜짝할 사이에 200억 대출 신청이 완료된 것이다.
아침 내 아무것도 안하고 기다렸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끝이나다니.
분노가 치밀었지만 분홍을 생각하며 겨우 잠재웠다.
그래, 내일도 있고, 모레도 있고, 정 안되면 찾아가지 뭐.
모두의 마음에 분홍이 필요한 때다.
마음이 딱딱할수록 의도치 않게 가까운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 쉽다. 서로 손잡고 이겨내야하는데 말이다. 고슴도치 같이 날선 마음에 분홍 포스트잇이라도 하나 붙여보면 어떨까. 마스크에 숨어 걸어가는 길 곳곳에 진달래가 움트고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