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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성씨 Feb 19. 2024

비수기에 대한 좋은 관점



친할머니의 집은 순천의 구도심에 있다. 대여섯살 때부터 오가던 그 노란 집을 나는 좋아한다. 나 어릴 때는 이 주변에 고만고만한 주택들 뿐이었는데 언제부턴가 뚝딱 뚝딱 재밌는 건물들이 지어지더니 몇 년 전에는 문화의 거리라는 간판 비슷한 게 생겼더라.


어릴 때처럼 골목을 누비며 문화의 거리를 탐방하고 싶었는데 올 때마다 뭐 그리 바쁜지 한 번을 여유롭게 걷지 못했다. 어쩌면 그냥 내 마음이 요근래 그렇게 너그럽지 못했던가보다. 한 시간이면 충분히 돌아볼 길, 차분하게 걷는 것이 뭐 그리 어렵다고 뜸을 들였을까.


설 연휴보다 하루 일찍 찾아온 덕일까, 그 사이 내 마음에도 약간의 넉넉함이 자라났을까. 식구들과 그간 못 다한 이야기를 나누고 올라갈 일만 남은 이른 오후. 드디어 느긋하게 돌담길 사이를 걷는다. 입춘대길을 매단 밧줄이 종소리와 함께 흔들리고. 커다란 진돗개가 할아버지와 산책을 하는 고즈넉한 풍경을 유난히 따뜻한

겨울 햇살이 어루만진다.


정처없이 걷다가 발견한 분위기 좋은 카페에, 조금은 즉흥적으로 들어섰다. 남편과 아이스 말차라떼를 하나씩 주문하고 옹기종기 한옥지붕들을 향해 난 창가 앞에 앉는다. 창문 밖에서 흔들리는 이름모를 잎사귀를 한참 바라보다가

눈이 마주친 남편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엄청 한가롭다."


남편 눈가에 잡힌 주름을 따라 웃으며 대답한다.


"좋잖아."


느긋한 고양이의 기지개처럼 쭈욱 테이블에 팔을 뻗어 몸을 늘어뜨린다. 스믈스믈 올라오는 노곤함을 반가워하며, 나는 다시 한 번 생각한다. 한가로움의 근사함에 대하여.


할아버지는 항상 손녀의 일터에 대해 물으실 때면 근심섞인 목소리로 '어떠냐' 하시고 '바빠요'하면 안도하신다. 그 뒤로 으레 쌍둥이말처럼 '바쁜게 좋은거지.' 하시는데 나 역시 그 말을 부정하지 않는다. 일감이 많다는 것은, 언제나 축복이다. 일이 없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한숨 쉬는것 보다는 정신없이 손 놀리며 땀흘리는 편이 오조 오억배 낫다.


얄궂기도 하지. 그런데 이 작은 도시의 카페에서 빨래처럼 엎드려 만끽하는 행복은 무슨 모순일까. 회사가 충분히 큰 것도 아니고 내 통장이며 살림살이 역시 흡족함과 거리가 먼데. 근 4일 이어지는 연휴에 쭉쭉 빠질 매출을 걱정하며 내쉬는 한숨이 아무 짝에 쓸모가 없어서인지도 모른다.

일어날 일은 기어코 일어나고야 만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두 팔 걷어 붙이고 최선을 다하는 것은 언제나 기본적인 자세이다만. 항상 모든 노력에 보상을 기대하는 것은 정신 건강에 해롭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사람을 돕지만 1년에 한 번은 태풍이 치고 인생사에도 늘 병충해가 있다.


설날 하루 전까지 바빴던 것에 감사하면서,

숨을 고르며 다음을 대비할 시간이 주어진 것에 안도하면서,

찾아올 다음 시즌을 또 열심히 준비하면.

그렇게 회사라는 눈을 굴리고, 굴리다보면.


손톱을 뜯으며 걱정하던 밤도, 먼지쌓인 바닥을 보며 쉬는 한숨도, 그 눈덩이와 함께 구르고 굴러,

돌아보니 여기까지 왔구나, 하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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