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어릴 때 외갓집에 가면 '노할머니' 방이 있었다.
할아버지의 엄마, 그러니까 증조할머니가 계신 넓고 따뜻한 방이었는데 할머니는 그 방에서 화투를 떼고 '테레비'를 보곤 하셨다. 명절날 풍경을 학교로 돌아와 이야기하면 친구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할아버지의 엄마가 계시다고?"
보통은 할아버지 할머니 중 한 분만 계시거나, 그마저도 병원에 누워 있으셨다. 할아버지의 엄마는 살아있는 희귀한 역사였다. 내가 나무처럼 자라던 1990년대는 그랬다.
지난주에 태어난 딸에게는 6분의 증조할머니, 증조 할아버지가 있다. 가만 보면 내 친구들의 아들딸도 비슷하다. 지금의 우리에게 생은 조금 더 길다.
그런데 고작 30대 중반인 나는 언제부터 이렇게,
이미 늦었다는 생각에 빠지게 되었을까.
너무 늦은 때,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이름들이 있다. 레이 크록, 그랜드마 모지스, 할랜드 샌더스, 샘 월튼.
아마 파헤칠수록 모래알같이 다양한 인생들을 만날 수 있으리라. 가만히 누워있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성공이 없다는 것만 기억하면, 두 손 두 발을 부지런히 놀리는 이들에게는 반드시 해가 비친다. 밤이 지나면 아침이 오는 것처럼 명확한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한결 서늘해진 밤공기 앞에서 한 해의 끝자락을 아쉬워한다.
후회스러운 것들도 있지만 분명 칭찬할만한 점들도 있다. 그래도 해낸 것은 아주 작게 보이고 못다한 것이 크게 보이는 것이다. 자꾸 시계와, 달력을 보게 된다. 벌써 8월 말이네, 이제 가을이다, 하며 안달복달한다. 모든 조급함은 곁눈질에서 온다. 서른이 채 안 되어 수십억을 벌어들인 사람의 이야기 앞에서, 꽃의 개화시기가 꽃마다 다르다는 사실을 떠올리기는 참 어렵다. 샴페인을 먼저 터뜨리는 사람도 있고 주름살 사이사이 박힌 노하우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잊고 마는 지.
아주 빤한 말이지만 꿈을 꾸기에 너무 늦은 때란 없다.
'하고 싶은 게 아무 것도 없다' 는 말을 가장 경계해야 한다. 마음 속에 아주 작은 불씨라도 타오르고 있다면 흰머리 두 세 개 쯤은 웃으며 뽑아낼 수 있다. 아무도 몰라보는 눈가 주름을 짚으며 한숨이 나오는 이유는 피부 때문이 아니라 지워 나갈 버킷 리스트가 텅 비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아주 작은 일이라도 하고 싶은 것을 해내며 살아야 한다. 생이 이토록 길어진 새천년의 시대에는 불확실한 미래가 두려워 그저 그런 오늘에 안주하는 것이 더 위험한 일 처럼 보인다. 팔순도 정정한 이 시대에 지금부터 20년이 지나도 대다수의 우리는 아직 청년이다. 젊어도 너무 젊은 지금, 아직 하고 싶은 게 남았다면 지금 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하나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