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일기
수채화는 수정이 어렵다. 그러나 유화는 여러 번 덧칠이 가능하다. 완성된 그림이라고 하더라도 나중에 마음이 바뀌면 그 위에 새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사포질을 하여 물감으로 인한 요철을 없애는 작업 정도로 새 그림에 대한 예의를 표한다. 가끔은 밑그림 때문에 새 그림에 깊이감이 더해지는 경우도 있다.
이중초상화라는 말이 성립하는지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초상화 밑바탕에 또 다른 초상화가 있어서 그렇게 부르나 보다. 이전 초상화를 지우고 다시 그리는 것에 불과한데, 그것이 인물화다 보니 이전의 인물에 대한 궁금증이 생길 수도 있겠다 싶다. 풍경화에서 그림 속에 있던 사람을 없애거나, 없던 사람을 추가로 그려 넣는 일, 정물화에서 사과 하나를 더 그리거나 덜어내는 일은 비일비재한데 말이다. 한 마리 나비를 이 꽃에서 저 꽃으로 옮겨놓는 일도ᆢᆢ
그렸던 초상을 지우고 그 위에 새로운 인물을 그렸다면 지워진 초상은 의미 없는 것 아닌가? 지워진 그림까지 포함하여 이중초상화라고 일컫는 것은, 현재의 그림이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어 보인다.
크림트의 초상화 중 유일한 이중초상화라고 해서, 더구나 도난당했던 그림이라서 더욱 유명해진 <여인의 초상>은 처음의 초상을 현재의 초상화로 감쪽같이 변형하였다. 처음의 초상화는 <젊은 여인의 초상>과 <백피쉬>라는 두 개의 제목으로 세상에 선보인 후 사라지고 도록의 사진으로만 남아있다.
2020년 1월, 코로나로 세상이 어수선할 때, 딸아이와 파리여행을 했었다. 하루 날을 잡아 가장 하고 싶은 일을 각자 하기로 했을 때 나는 오르세 미술관을 재방문하기로 했고, 딸아이는 루브르박물관이 있는 튈르리 공원 러닝을 선택했다. 오르세 미술관은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들로 넘쳐난다. 드가의 전시관이 꽤 넓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다양한 발레리나의 그림뿐만 아니라 조각품도 볼 수 있었다. 르느와르의 화사한 그림은 전시관을 밝게 만든다. 고흐의 그림과 그가 닮고 싶어 했던 밀레의 그림, 마네와 모리조의 모습이 담긴 그림들. 모네의 루앙대성당 시리즈는 상업적인 수완이 엿보이는 그림으로 시대를 앞서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 많은 그림 중에서 가장 충격적인 그림은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과 <오르낭의 장례식>이었다. <세상의 기원>은 그 앞에 서있기가 민망할 정도로 묘사가 구체적이고 적나라하다. 제목이 적절한 것도 같고, 선정성을 더욱 키우는 것도 같고. 옆에 사람이 없을 때만 몇 번이고 다시 보았던 그림이다.
<오르낭의 장례식>은 그 크기에 압도당한다. 길이가 6.6m로 어느 시골의 장례식 장면을 묘사한 작품이다. 장례식에 참가한 마을 사람들을 모델로, 누구도 비켜갈 수 없는 죽음을 소재로 다뤘다. 실제 사람 크기로 그려진 마을 사람들이 매장을 위해 파놓은 구덩이 옆으로 쭉 늘어서서 마지막 미사를 보는 이 그림 앞에 서면 나도 장례식에 참가하고 있는 듯한 착각을 하게 된다.
쿠르베는 사실주의 화가로 명명된다. 그에게 천사를 그려보라는 주문에 “내게 천사를 데려오면 그리겠다”라고 응수했다고 한다. <안녕하세요? 쿠르베 씨>라는 작품 속 쿠르베 본인의 모습은 그 어떤 관습에도 순순히 따를 것 같지 않은 오만함이 엿보인다.
쿠르베의 작품들 속에 <부상당한 남자>도 거기 있었다. <상처 입은 남자>로 불리기도 하는 자화상이다. 그 그림 밑층에 지워진 한 사람이 있었던 걸 그때는 몰랐다.
나무 아래에 누워있는 쿠르베 곁에 애초에는 연인이 그의 팔에 감싸 안겨 있었다. 변심했는지 여인은 지워지고 칼에 베인 가슴에서 붉은 피가 흘러 하얀 셔츠를 적시고 있다.
이것도 이중초상화인가?
2026.3.12. 오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