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조금씩 나에게로 돌아가는 중"
1화. 떠나는 마음, 도착하는 마음
: 퇴사 후의 허전함과 막막함, 충동처럼 제주행 비행기를 탄 하루
"13년 동안 걸었던 길은 늘 같은 방향이었다.
회사로, 사무실로, 나 아닌 누군가의 기준을 향해서.”
퇴사를 한 건, 용기라기보다는 숨이 턱 막혀서였다. 타인의 영향도 있었지만, 결국은 나 스스로도 포기해서 내린 결정이었다.
마지막 출근 날, 동료들과 인사를 해야 했지만, 왠지 모를 씁쓸함과 허전함에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짐을 차까지 들어준 동료에게도 편한 웃음 하나 보여주지 못한 채, “다음에 커피 한잔해요.”라는 인사만 남기고 집으로 향했다.
퇴사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이제 뭘 해야 하지?’ 하는 막연함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주변에서 “13년간 한 번도 쉬지 않고 일했으니 이제 좀 쉬어도 돼”라며 위로해 줬지만,
정신없이 바쁘게 일하던 나로서는 오히려 불안하고 초조하기만 했다.
그때 문득, 너무 힘들었던 시기에 짧게 짧게 떠났던 ‘제주’가 생각났다.
‘그래, 그렇게 해보고 싶었던 제주 한 달 살이, 이번 기회에 해보자.’
늦은 나이이긴 했지만, 한 번쯤은 게스트하우스 스텝으로 일해보고 싶었다.
예전에 회사 후배와 제주로 여행 갔을 때 게스트하우스에서 지낸 추억이 즐거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파티 게스트하우스는 20대 초중반 스텝들이 많았고, 30대인 내가 그 안에 섞이기엔 어색할 것 같았다.
그래서 어느 정도 쉼이 있으면서도, 정적인 업무를 할 수 있는 자리를 한참 찾아보았다.
그러다 조건이 맞는 게스트하우스를 발견했고, 바로 지원했다.
다행히도 다음 날, 스텝으로 일할 수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운이 좋았던 걸까.
1월, 설 연휴가 낀 주에 나는 가족과의 만남 대신 제주행을 택했다.
그렇게 생각이 들자마자 실행으로 옮겼고, 제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창가 자리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마음이 울컥했다.
‘괜찮다’고 애써 눌러왔던 퇴사 후의 감정들이, 그 순간 한꺼번에 쏟아지는 듯했다.
제주도에 도착해서 바로 게스트 하우스로 향했다.
그렇게 도착한 숙소에 계시던 매니저님과 가볍게 인사를 하고 앞으로 머물게 될 방을 안내받았다.
간단히 짐을 풀고 숙소 부근을 살펴보며 저녁에 될 때까지 걸었다.
그날 밤, 게스트하우스 숙소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을 때, 하루 종일 긴장을 풀지 못했던 몸이 서서히 이완되기 시작했다.
낯선 곳에서의 첫 하루는 예상보다 버거웠지만, 조금은 따뜻했다.
아직 많은 것이 어색하고 서툴렀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희미하게 피어나는 기대감이 있었다.
'조금씩 괜찮아질 거야.'
창밖으로 들려오는 제주 밤바람 소리가 마치 그렇게 말해주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2화. 게스트 하우스의 아침은 전복죽 냄새
: 첫 출근, 제주 토박이 주방 어머님들과의 만남
“처음 보는 얼굴인데, 왜 이리 이쁘노.”
제주의 첫 출근 날, 주방 어멍께서 건넨 그 한마디에 나는 이미 마음이 스르르 녹아내렸다.
살가우면서도 묵직한 그 말투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이 섬의 온기를 느꼈다.
1층 식당 문을 열자마자 전복죽 냄새가 코끝을 감쌌다.
불 위에서 부글부글 끓던 솥에서는, 누군가의 정성과 시간이 고요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어제 저녁도 대충 때운 터라 배는 아침부터 요란했고,
퇴사 직전까지 이어진 스트레스는 위염으로 이어졌고, 그 여파는 꽤나 오래갔다.
2주 만에 체중은 4kg이나 빠졌고, 속보다 마음이 더 헛헛했던 날들이었다.
그런 나를 본 어멍은 다정하게 말했다.
“입맛 없주가? 삶은 계란 허멍 좀 묵어볼래?”
나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합니다”라고 대답했고, 조심스레 계란을 입에 넣었다.
그 순간, 단단히 닫혀 있던 마음이 조금 열렸다.
13년 동안 사무직만 해온 내가 낯선 주방에 선 건 작은 용기였다.
설거지, 서빙, 식재료 손질, 카페 보조까지 모든 게 서툴렀지만 배우고 싶었다.
외국인 손님이 올 땐 예전 일 덕분에 영어와 중국어로 응대도 조금 도왔다.
식사가 끝난 뒤, 어멍들은 자연스럽게 분주해졌다.
칼을 들고, 나물을 다듬고, 생선을 손질하는 손길은 익숙하고 단단했다.
나는 어색한 몸짓으로 그들 뒤를 따르며, 손끝에 배인 세월을 조용히 지켜봤다.
“이 칼, 손 데지 않게 조심혀. 무 썰 때 잘못허면 다쳐불어.”
앞치마를 매만지며 어멍 중 한 분이 건넨 말에 나는 다시 자세를 고쳐 앉았다.
단호하지만 따뜻한 그 말 한마디가 몸과 마음을 곧게 세웠다.
서툰 손으로 무를 썰고, 감자를 깎고, 싱크대 앞에서 물을 튀기며 하루를 보냈다.
시간은 더디게 흘렀지만, 그 하루는 오랜만에 무언가를 '살아낸' 느낌을 주었다.
“오늘은 잘했주게. 손도 안 다치고 말이우다.”
어멍 한 분이 퇴근 직전 내게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그 웃음엔 칭찬이 절반, 격려가 절반이었다.
나는 그 웃음 하나를 가슴에 품고, 게스트하우스를 나서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해가 지는 제주 하늘은 생각보다 따뜻했고,
전복죽 냄새가 묻은 옷자락은, 나도 모르게 집처럼 느껴졌다.
3화. 천천히 해도돼, 몸보다 마음이 먼저니깐
: 제주에서의 아침은 바다보다 따뜻해
다음 날 아침, 전날보다는 덜 어색한 발걸음으로 주방에 들어섰다.
어제 하루 일을 해봤다는 자신감이 조금 생긴 탓일까, 나는 나름대로 서둘러 주방일을 시작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나를 향해 어멍이 조용히 말했다.
“혼저 옵서게, 천천히 해도 괜찮아. 밥하는 건 말이지, 손보다 마음이 먼저 가야 헌다.”
서툰 손으로 무를 썰다 엉성한 조각이 나오자 괜히 민망해져 눈치를 살피던 내게 건넨 그 말.
어멍의 나즈막한 목소리는 조용히, 그러나 깊게 마음을 어루만졌다.
누가 다그친 것도 아닌데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어쩌면 그건 요리를 배우는 시간이 아니라, 나를 회복하는 시간이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똑같은 식재료라도 누구 손에 쥐어지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는 걸, 나는 제주에서 처음 배웠다.
정갈한 손질, 불 앞에서의 집중, 그리고 한 사람의 밥상을 준비하는 진심.
그 모든 것이 한끼의 식사를 만들었다.
낯선 환경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티는 줄만 알았던 내가, 조금씩 이 공간을 살아내고 있었다.
말 대신 마음을 써야 하는 주방에서, 나는 다시 나를 회복하고 있었다.
퇴근 후, 나는 서귀포항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바닷바람은 생각보다 차가웠지만, 묘하게도 그 차가움이 마음을 맑게 해주는 것 같았다.
방금 지나온 하루를 곱씹었다.
서툰 내게 건넨 위로의 말들. 모두가 낯설었지만 이상하게 익숙하고, 따뜻했다.
'나는 잘하고 있는 걸까.'
그 질문이 마음 한켠에서 맴돌았지만, 항구를 따라 걷는 동안 그 물음은 조금씩 잦아들었다.
바다를 바라보며 깊은 숨을 들이쉬었을 때,
어쩌면 지금 이 삶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천히 걸어도 괜찮다고, 밥은 마음으로 짓는 거라고 말해준 그날의 주방처럼.
"나는 오늘, 조금 더 괜찮은 내가 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