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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갱새 Jan 27. 2022

남겨진다는 것..

아버지, 어머니, 형 그리고 나. 저는 꽤나 부족하지 않은 집에서 태어나 행복한 유소년 기를 보냈습니다. 아버지는 중소기업의 사장이셨고 어머니는 실력 있는 미용기술을 가지신 미용사이십니다. 살아오면서 여러 번의 면접들을 거치며 가장 행복했던 시절을 물어보았을 때 제 대답은 항상 같았습니다. 가족들과 놀이공원을 가서 웃으며 놀이기구를 타고 같이 사진을 찍고 추억을 남기고자 했을 때. 어렸을 때부터 저는 유난히 장난기가 많고 친구들을 잘 사귀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항상 제게 웃는 얼굴로 맞이해주고, 귀여워해 주고, 좋아해 줬습니다. 20여 년이 흘렀지만 5살 즈음의 기억도 생생히 기억나는 것이 있는 것을 보면 분명 저는 당시에 행복했고 그 순간을 기억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초등학교 입학을 하고 어머니는 제게 항상 앞머리 브리지 염색을 형형색색으로 해주곤 하셨습니다. 염색한 머리카락 일부분만 턱까지 기르고 했었죠..ㅎㅎ(당시엔 멋이었고 친구들에게 이목을 끌었습니다^^) 노오란 앞머리를 흩날리며 친구들과 뛰어다니고 유별난 장난기에 사고도 많이 치고 많이 다치기도 했습니다.


특히 아파트 단지 상가에 자리 잡고 있던 어머니 미용실 위층의 비디오방 사장님 아들이었던 친구(모현)와 매일같이 놀았던 것이 기억이 납니다. 학교가 끝나면 항상 상가건물 오락실에서 같이 게임도 하고 비디오방에 틀어박혀서 만화도 같이보고 둘이서 술래잡기도 많이 했는데, 워낙 격하게 놀았던지라 모현이가 술래잡기를 지기 싫었는지 창문에서 뛰어내렸다가 머리부터 떨어져 병원에 실려갔던 적도 있었습니다. 모현이는 본인 머리가 찢어졌는데도 웃고 있었고 동시에 아파서 울고도 있었습니다..ㅋㅋ


초등학교 3학년이 되던 해, 모현이가 부모님께서 여동생에게 새로운 롤러브레이드를 사주셨다며 제게 자랑을 했을 적이 있는데 평소에 서로 롤러브레이드 경주를 즐겨하며 경쟁을 자주 했었고 경쟁심이 생긴 저는 새로운 롤러브레이드로 모현 이를 이기고자 여동생 것을 빌려달라 했습니다. 상가건물 앞 작은 도로에서 저는 모현이 여동생 롤러브레이드를 빌려 신고서 모현이에게 오랜만에 경주를 하자고 졸랐고 우리 둘은 있는 힘껏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경쟁심이 생긴 저는 무리하게 달리다가 모현이 여동생의 롤러브레이드가 발에 맞지 않아서 그런지 상가 옆 주차장 부근에서 넘어지고 바닥을 굴렀습니다. 모현이가 괜찮냐며 제게 달려왔고 저는 괜찮다며 모현이가 건넨 손을 붙잡고 일어서려 했지만 다리에 느껴본 적 없는 커다란 고통이 느껴졌었고 그 자리에서 다시 철퍼덕 넘어졌습니다. 


정강이 뼈가 부러진 것입니다. 울면서 모현이에게 미용실 가서 어머니 좀 불러와달라고 했는데 손님이 많아 어머니는 금방 내려오지 못하셨고 계속해서 기다리던 중 미용실 손님이셨던 아주머니 한 분이 제 옆을 지나가시기에 다리가 부러진 것 같다고 도와달라고 울면서 부탁을 하였지만.. 아주머니는 "어휴~ 내가 너를 어떻게 엎고 가~" 하시며 가던 길을 그냥 가셨습니다. 차들이 왕래하는 주차장에 저는 홀로 남겨졌습니다. 우연히 미용실에 가시던 아저씨 한 분이 저를 발견하시고는 미용실에 데려다주셨고, 병원까지 데려다 주셨습니다. 제 기억상 적어도 두 달은 병원 침상에 누워 움직이지도 못한 채 밥만 먹으며 만화만 보길 일삼으며 치료를 받았습니다. 퇴원 후에도 깁스를 한 채 집안에서 돌아다니며 다리가 낫길 기다렸는데, 그 기간 동안 살이 굉장히 많이 찌게 되었고 항상 말랐었던 저는 비만이 되었습니다. 


오랜만에 학교에 다시 돌아오니 친구들이 저를 바라보는 시선이 사뭇 다름을 느꼈습니다. 갑자기 왜 이렇게 달라졌냐며 저를 막 쳐다보다 돼지라고 놀리기 시작했습니다. 제 친형도 제가 부끄러웠는지 제게 모질게 대하곤 했었습니다. 초등학교 고학년에 접어들고 달라지는 것은 없었습니다. 학교에서 제가 가장 친하게 지내던 친구조차 제가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 다른 친구들 무리에 끼며 이미 저와 가까웠던 시기는 잊고 제가 아닌 다른 친구들과 매일같이 놀고 있었고 저를 놀리는 것에 가담을 했습니다. 쉬는 시간마다 저는 친구들에게 둘러싸여서 돼지라 놀림받고 성추행도 당하며 저는 그것조차 관심이라 여겼는지 웃으며 다 받아줬습니다. 점심시간에 축구한 번 제대로 못해봤던 것 같습니다. 다리를 완벽하게 회복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기도 했고 살이 쪄 몸이 둔해져서 재미가 없다며 끼워주지 않았습니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에는 어머니의 권유로 단과학원들을 다니며 공부하곤 하였는데 학원에서도 따돌림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친구들의 웃으며 저를 흘기는 눈빛과 여학생들의 업신여기는 듯한 표정들을 잊을 수 없습니다. 학원에서 수업을 듣다가 졸려서 엎어져 잔 적이 있었는데, 깨어보니 쉬는 시간이었고 주변을 둘러보니 친구들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들 어디에 갔나 복도를 살펴보고는 다시 창문 밖을 바라보니 저를 뺀 모두가 함께 숨바꼭질을 하며 깔깔대며 놀고 있었습니다. 양팔을 창문틀에 얹고 턱을 기댄 채 친구들이 노는 것을 지켜보며 같이 놀고 싶다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텅 빈 교실에 혼자 남겨졌습니다. 이러한 나날들이 계속되니 자연스레 친구들, 사람들을 대하는 것이 부자연스러워졌고 모두가 저를 싫어한다는 생각이 마음속 깊이 자리 잡아 먼저 말을 거는 것조차 어려워졌습니다.


그렇게 저는 점점 소심해져 갔습니다. 그리고 그 시기에 부쩍 아버지와 어머니의 마찰이 많아졌었습니다. 집에서 심심하면 큰 고함이 오갔고 저는 무서워서 울며 방문을 틀어잠구곤 했습니다. 아침밥을 먹는 것이 불편했습니다. 워낙 눈치도 많이 보는 성격이라 아무렇지 않은 척 의연하게 넘기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점점 술에 절여져서 집에 들어오는 일이 많아졌고 술버릇도 좋지 못해 부엌 싱크대에 소변본 것을 제가 뒷정리하기도 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점점 저를 멀리하였습니다. 제가 변비에 고통스러워하며 배를 부여잡고 집을 나뒹굴어도 걱정하는 표정 하나 없이 귀찮다는 듯 신경 쓰지 않았고, 새벽에 제 얼굴이 파래지고 그때서야 응급실에 데려가곤 하였습니다.


초등학교 고학년, 제 삶의 모든 것이 변한 것만 같았습니다. 비디오방 모현이는 멀리 이사 가고, 학교 친구들은 저를 놀리기 일쑤이며 집안은 화목하지 못했습니다. 여태까지 와의 삶과는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어느 날은 밤늦게까지 집에 혼자 가족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적이 있는데, 혼자 거실에 누워서 티비를 보다 졸림에 눈을 꿈뻑이고 있었고 잠에 들기 직전 누군가 통화를 하며 집에 들어왔습니다. 아버지였습니다. 저는 아버지께 살갑게 인사하지 못하였기에 자는 척을 하였고 통화내용을 다 듣게 되었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이 들렸습니다. 통화 속의 그 사람이 분명 어머니는 아니었지만 당시에는 크게 문제점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한 번 밤늦게까지 혼자 가족들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어머니는 제게 "OO야, OO는 엄마랑 같이 살자?" 라며 울며 수십 번은 반복해서 말하였고 저는 무슨 의미인지도 모른 채 같이 울며 같이 산다고 똑같이 반복해서 말했었습니다. 전화를 끊었고, 13살 이었던 저는 텅 빈 고요한 집에 혼자 남겨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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