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에 온 지 별로 안 됐을 무렵이었다.
난 어학원을 따로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친구 만들기가 쉽지 않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을 혼자 만들어나가야 되는 환경이었다.
그래서 묵혀뒀던 '헬로우톡' 앱을 조금씩 열어보기 시작했다.
혹시 아일랜드에 살고 있는 외국 친구들을 사귈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둘러보다 보니 아일랜드에 사는 사람들이 꽤 있었고, 그중 한 브라질 사람이 눈에 띄었다.
더블린에 사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눈길이 가는 외모였고 한국에 관심도 많아 보였다. 그러나 평소 모르는 사람들과 채팅을 좋아하진 않아서 따로 말을 걸진 않았다. 그렇게 넘어가나 싶었는데 다음 날, 그 친구에게 채팅이 온 것이다.
"만나서 커피 한 잔 할래?"
이 친구 이름은 '타미'였다. 타미는 특별한 대화 없이 나에게 만나기를 제안했다.
당연히 당황스러웠다.
"근데 너 골웨이에 사는 거 아니야? 난 더블린에 사는데?"
그러자 타미는 더블린에 일정이 있어 들릴 계획이 있다고 했다.
처음에는 경계심이 들기도 하고 좀 부담스러웠는데 밑져야 본전이라고 생각하고 걱정을 내려놓기로 했다. 그렇게 약속을 잡고 잠깐 대화를 나누었는데, 뭔가 조금 특이했다.
"만나면 나한테 친절하게 대해줘"
"너 나쁜 사람 아니지?"
이런 식으로 나를 경계하는 것이었다.
먼저 채팅한 것도, 만나자고 제안한 것도 타미인데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심지어 채팅하면서도 그렇게 느낄만한 말을 한 적도 없고 대화가 많이 오고 간 것도 아니었다.
"나 지금 친절하게 느껴지지 않아? 만나면 알게 될 거야. 너가 왜 그런 걱정을 하는지 모르겠어."
그러자 타미는 자기가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채팅을 걸어서 만나자고 제안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약속 당일 날, 먼저 도착해 타미를 기다리고 있는데 저 멀리서 타미처럼 보이는 여자가 걸어왔다.
타미의 첫인상은 솔직히 조금 놀랐다.
키도 크고 옷도 잘 입고 예뻤다. 그냥 모델 같았다.
간단히 인사한 뒤 카페를 찾기 위해 함께 걸었다.
딱히 정해둔 곳이 없었기에 그냥 발길 닿는 대로 가 보기로 했다.
로컬 카페를 찾고 싶었지만 마땅한 곳이 없어 한참을 돌다가 결국 스타벅스로 들어갔다.
나는 타미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며 대화를 이끌려고 노력했다.
타미는 대답을 길게 하는 편도 아니었고 사교적인 사람으로는 느껴지진 않았다. 또 뭔가 어색한 듯 표정도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았고 엄청 피곤해 보이기도 했다. 알고 보니 타미는 대학생이면서 골웨이와 더블린을 오고 가며 모델 일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빡빡한 일정 때문에 한숨도 못 잔 것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여행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그 순간 타미의 눈빛이 확 달라졌다.
아이처럼 밝게 웃으며 최근 다녀온 여행에 대해 신나게 이야기했다.
타미가 돌아갈 시간이 되어 우리는 함께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갔다.
시간이 남아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골웨이로 향하는 타미를 배웅했다.
타미와의 첫 만남은 내가 걱정했던 것보다 정말 평범했다. 그러나 대화가 잘 통한다는 느낌도 모르겠고 친구로 지내기도 힘들 거라고 생각했다. 왠지 내가 에너지를 많이 써야 할 관계 같았다. 그래서 그 이후로 따로 연락하지 않았다.
그렇게 타미와 만났던 날을 잊어갈 때쯤, 뜬금없이 타미에게 연락이 왔다. 당시 카페 마감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만나자는 것이었다. 밤 8~9시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당장 시티센터로 가기에는 너무 늦었고 내일도 오픈 출근이어서 아무래도 무리였다. 그래서 다음에 보자고 거절했지만 타미는 나에게 다시 한번 물어봤다.
"그럼 내일 너 일 끝나고 보자"
사실 엄청 땡기지는 않았는데 그렇다고 거절할 이유도 딱히 없었다. 또 타미는 내가 될 때까지 계속 물을 것만 같았다. 동시에 타미의 분위기도 뭔가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음 날, 일을 마치고 시티센터 펍으로 가는 루아스를 탔다. 갑자기 타미를 만난다는 게 이상했다.
편한 옷차림이었던 나와 달리 타미는 드레스를 입고 등장했다. 타미는 웃는 얼굴로 내게 인사했고 첫 만남과 달리 텐션도 훨씬 좋아 보였다. 역시나 뭔가 다르다는 걸 온몸으로 확신했다.
펍에 들어서자마자 우리는 샷으로 시작했다. 타미는 꽤 적극적이었는데 술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게 과해보이지는 않았고 귀엽게 보였다. 이 날은 확실히 마지막 만남과는 달랐다. 대화도 자연스럽게 이어지면서 나도 점점 대화 속에 몰입하기 시작했고 몰랐던 타미의 다른 면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분위기가 조금씩 달라지더니, 타미는 나에게 확실한 호감을 표현했다. 나도 굳이 피하지는 않았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타미가 그래도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타미를 내가 굳이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또 나는 기본적으로 연애에 있어서 조심스러운 편이었다. 가볍고 심플한 이유로 누군가를 좋아하고 만난다는 게 어려운 사람이었고 가끔씩은 이런 내 모습들이 답답하기도 했다. 사람은 만나봐야 정확히 알 수 있듯이, 굳이 이것저것 많이 재지 않더라도 그냥 좋은 사람이라면 굳이 거리를 둘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내 마음속 한 켠에 자리하곤 했다.
따라서 아일랜드에 머무는 동안만큼은 연인 관계이든, 친구 관계이든 조금 더 오픈된 마인드로 사람들을 대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타미를 집까지 데려다주는 길, 우리는 확실히 더 이상 친구 사이는 아니었다. 서로 마음이 통했다는 걸 분명히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직 연인 사이라고는 말할 순 없었다. 타미는 내가 본 어떤 모습보다 행복해 보였다. 집으로 가는 길 내내 나에게 적극적인 호감을 계속 표현했고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지내면 좋을지 막 이야기를 쏟아냈다.
하지만 난 솔직히 많이 부담스러웠다. 아직 서로 모르는 게 너무나 많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아닌데 벌써부터 마치 1년 된 연인처럼 나를 대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같이 해외여행도 가고 내가 아일랜드에 쭉 남아 같이 함께하자는 식의 대화였다. 행복해 보이는 타미의 모습은 보기 좋았지만 내가 감당하기 버거울 정도로 들떠 있었고 너무나 상반된 모습에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하는지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타미와 달리 나는 설레거나 좋은 감정보다는 당혹스러움에 조금 심각해있었다. 확실히 타미는 뭔가 다르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조심스러운 게 타미는 브라질에서 왔고 난 국제연애 경험이 없었던 터라 섣불리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머리가 복잡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