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산, 물은 물

그리고 '아무것도 아닌'

by 수요일엔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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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조계종 종정을 지내신 성철 스님의 이 법어(法語)를 처음 들었을 때, 솔직히 맥이 빠졌습니다. 너무나 당연하고 뻔한 말이 아닌가. 산이 산이고 물이 물이지, 그럼 무엇이란 말인가. 자고로 명언이나 고인의 말씀이란 다소 복잡하고 심오하여 단박에 해석하기 어려운 맛이 있어야 그럴듯하게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대학 초년생 시절, 멋모르고 집어 든 키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 문고판을 붙들고 몇 날 며칠을 씨름하다가 결국 지적 허영심에 대한 깊은 자괴감에 빠졌던 기억이 스칩니다. 단 한 페이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난해한 개념과 문장 앞에서 저의 얕은 지성은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번역의 문제였을지도 모릅니다. 딱딱한 철학자의 언어가 아니라, 어린이의 눈높이로 세상을 풀어내는 아동문학가의 손을 거쳤더라면 절망의 철학이 조금은 더 살갑게 다가왔을까요. "미국 대통령의 연설문은 초등학교 4학년 수준으로 작성된다"는 이야기는 그래서 흥미롭습니다. 가장 쉬운 언어로 가장 많은 사람에게 메시지를 전하려는 실용적 지혜. 그것이야말로 소통의 본질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철 스님의 법어는 가장 쉬운 언어로 된 궁극의 화두(話頭)였을지 모릅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는 말의 참뜻은 무엇일까요. 세월이 흘러 돌이켜보니, 이 말씀은 '있는 그대로 보라'는 가르침이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우리가 '산'을 볼 때, 우리는 순수한 산 자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정복해야 할 대상', '아름다운 풍경', '부동산 가치' 등 온갖 욕망과 개념의 필터를 덧씌워 봅니다. '물'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갈증을 해소할 자원, 놀이의 공간, 때로는 두려운 심연으로 인식할 뿐, 그저 흐르는 물 자체로 보지 못합니다. 스님의 말씀은 이러한 인간 중심의 모든 해석과 분별심을 걷어내고, 사물의 본질, 그 실재적 존재 자체를 직시하라는 깨우침이었을 겁니다. 나의 욕망과 감정, 지식과 편견을 내려놓았을 때 비로소 산은 오롯이 산으로, 물은 비로소 물로 존재하게 된다는 것. 이는 단순한 진리를 넘어선 깊은 성찰의 경지일 것입니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제목,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는 제게 또 다른 생각의 갈래를 열어주었습니다. 그의 영화 대부분이 그렇듯, 내용은 희미한 장면들의 파편으로만 기억 속에 흩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유독 이 제목만큼은 뇌리에 선명하게 박혀, 제 삶의 여러 국면에서 불쑥 고개를 내밀곤 합니다. 때로는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로, 혹은 '여기에선 맞고 저기에선 틀리다' 등으로 변주하며 상황과 관계의 가변성을 곱씹어보는 것이지요.


어제의 정의(正義)가 오늘의 불의(不義)가 되고, 맹목적으로 믿었던 신념이 어느 날 부끄러운 과거가 되기도 합니다. 절대불변의 진리란 과연 존재하는가. '산은 산'이라는 불변의 명제 앞에서,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는 관계와 상황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진리의 상대성을 이야기합니다. 이 둘은 서로 모순되는 것 같지만, 어쩌면 세상의 양면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존재의 본질은 변하지 않지만(산은 산이다), 그것을 둘러싼 우리의 인식과 관계, 그리고 가치 판단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끊임없이 흔들리고 재정의되는 것(맞고 틀리다)처럼 말입니다.


최근에 저는 스스로를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규정하는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는 어떤 중대한 사태나 논의의 중심에서 자신을 교묘하게 비켜 세우는 기술을 구사했습니다. 책임과 역할, 그리고 관계의 무게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를 사물화(事物化)하는 남다른 재주였습니다. 처음에는 그 말이 담고 있는 의미를 파악하고자 오래도록 고민했습니다. 그를 시시한 사람, 무능력자, 파시스트, 혹은 염세주의자 중 하나로 규정할 수 있다면 차라리 이해하기 쉬웠을 겁니다. 우리는 타인을 어떤 범주 안에 넣음으로써 안도감을 느끼는 경향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아무것도 아닌'이라는 규정은 그 모든 범주화를 거부하는, 텅 빈 선언이었습니다.

이는 '산은 산이다'라는 직시와는 정반대의 지점에 있습니다. 산을 산으로 보는 것이 존재의 본질을 긍정하는 것이라면, 스스로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드는 것은 존재의 의미를 의도적으로 소거하는 행위입니다. 그것은 겸손의 표현이라기보다는 관계 맺기를 회피하고 책임을 유기하려는 정교한 방어기제에 가까웠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됨으로써 그는 어떤 비판과 기대에서도 자유로워지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닌 것'보다는 서투른 사람, 실수하는 사람, 때로는 틀리는 사람으로 규정되는 것이 오히려 더 인간적이고 건강한 표현이 아닐까요.


결국 우리는 모두 무언가로 규정되고, 무언가를 규정하며 살아갑니다. '산은 산'이라는 선언적 진리와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는 관계의 진리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립니다. 키르케고르의 문장이 여전히 어렵고, 성철 스님의 법어가 아득하게 느껴지는 평범한 우리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분명히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 앞에 놓인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 노력하는 것, 그리고 변화하는 관계 속에서 어제의 내가 틀렸음을 인정할 수 있는 용기를 갖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를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지워버리는 대신, 서툴고 부족하더라도 '나'라는 존재의 무게를 기꺼이 짊어지고 가는 것. 그것이 바로 이 복잡하고 모호한 세상을 조금 더 진실하게 살아가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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