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회의실

청국장과 땅콩버터

by 수요일엔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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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들은 뜨르르하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유학을 갔거나 미국 대학을 졸업했거나, 하여튼 말은 잘한다. 그런데 말만 잘한다. 내가 몸담은 패션 비즈니스에 있는 일부 ‘영어 장사치’들의 이야기다. 선진 지식으로 무장한 진짜 전문가들도 많지만, 유독 이 바닥의 유학파들은 얼치기들이 많다. 국내에서 바닥부터 구르고 뒹굴었던 산전수전의 용사도, 땅콩버터 바른 혓바닥을 현란하게 놀리는 그들 앞에서는 단칼에 쓰러진다. 오너들은 그들을 사랑한다. 토종 청국장은 촌스럽고, 버터 향기는 세련됐다고 믿기 때문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회의실에는 고소한 땅콩버터 냄새가 진동했다.

"대표님, 우리가 직면한 Challenge의 Core는 결국 Brand Equity입니다. 우리의 Legacy를 Re-branding 하여 고객에게 보다 Compelling 하고 Immersive 한 Narrative를 전달해야 합니다."

얼마 전 해외 MBA를 마치고 낙하산으로 떨어진 James 팀장이 유려한 제스처와 함께 말했다. 최근 급락한 플래그십 스토어의 매출에 대한 대책 회의였다. 그의 입에서는 ‘시너지’, ‘내러티브’, ‘옴니채널’ 같은, 실체는 없으나 있어 보이는 단어들이 쉴 새 없이 튀어나왔다. 대표는 거의 황홀경에 빠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지난 일주일간 현장에서 발로 뛰며 만든 두툼한 보고서를 말없이 내려다봤다. 거기엔 복잡한 영어 대신 ‘고객 동선’, ‘재고 회전율’, ‘직원 이탈’ 같은, 땀 냄새나는 단어들이 적혀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의 얘기를 듣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를 바란다.’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쳤다. 어쩌면 나는 이 회의실의 ‘인간 해우소’ 같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대표는 James 팀장의 화려한 독주를 듣고 싶어 하고, James 팀장은 자신의 지식을 뽐내고 싶어 한다. 내 이야기는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다. 식당에서 네 사람이 각자 자기 말만 떠들어대는 진풍경처럼, 이 회의 역시 소통을 가장한 네 개의 독백이 부딪히는 현장이었다. 아, 나는 한 번에 하나밖에 못 하는데. 술과 담배를 동시에 즐기던 소싯적 재능은 다 어디로 갔을까.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팀장님, 그 좋은 전략 이전에 현장의 VMD랑 재고 문제부터 확인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지난 시즌부터 고객 클레임이…”

그건 아니고, 부장님.”

James 팀장은 내 말을 자르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전형적인 시작이었다.


‘그들은 항상 “그건 아니고”라고 말을 시작한다. 왜 그렇게 부정적인 말로 기선을 제압하려 할까. 시간이 많이 경과했다고 전문가는 아니다. 지혜를 가지지 못한 오랜 경력은 아집이나 꼰대가 되기 십상이다.’

그의 눈빛은 마치 내 보고서가 구시대의 유물이라도 되는 듯했다. “That’s a very microscopic view. We need to see the BIG picture. 숲을 봐야죠.”

대표가 박수를 쳤다. “아, 역시 James 팀장이야. 김 부장, 좋은 의견이지만 그건 너무 촌스럽잖아! 우리도 이제 좀 글로벌하게 가야지!”


회의는 ‘브랜드 헤리티지를 레버리지 한 내러티브 구축 TF팀 구성’이라는, 아무도 그 실체를 모르는 결론으로 끝났다. 나는 너덜너덜해진 보고서를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상도가 없다. 전문가인 양하는 자들이 너무 많다. 나의 오랜 경력과 경험은 그저 촌스러운 청국장 취급을 받을 뿐이었다.


창밖을 보며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실명을 거론하기 어려운 칼럼처럼, 직설을 던지지 못하는 회의는 결국 공허한 잡소리만 남긴다. 나는 책상 위에 보고서를 던졌다.


이번 보고는 망했다. 망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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