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욱한 담배연기는 사라지고
서울 지리도 모르고 아는 사람도 없는 처지였다. 전근 명령 며칠 뒤 합류한 아내와 함께 살 집을 찾으러 무작정 버스를 탄 것이, 이후의 긴 세월을 결정했다. 영등포 방향으로 갔더라면 나름 서울에 터를 잡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버스는 반대 방향으로 향했고, 시흥동 끝자락의 그린벨트를 지나며 엄습한 두려움에 급하게 내린 동네가 안양 석수동이었다. 산자락 밑 빌라에 둥지를 틀면서, 나의 팍팍한 서울 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사무실이 있던 독산동(禿山洞). ‘대머리 독’ 자를 쓰는 민둥산 동네라는 걸 까마득히 모르고 5년을 보냈다. 그 5년의 기억 중심에는 사무실 모퉁이에 있던 ‘코너집’이라는 맥주집이 있다. 우리 부서의 공식 외상 장부가 그 집에 있었다. 회식은 빈번했고 월말이면 예산을 초과한 술값 장부를 든 선임이 부장님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게 월례행사였다. 빠듯한 부서 예산에 부장님의 결재는 마른 가뭄의 단비와도 같았다.
그 시절 토요일은 반나절 근무를 했다. 퇴근 무렵이면 우리는 “짜장면 내기 한판?”을 외치며 부리나케 당구장으로 피신했다. 그곳은 부장님의 감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해방구였다. 적어도 우리는 그렇게 믿었다.
“야, 김 대리. 맛세이(찍어치기) 길이 안 보이냐?” 선배의 핀잔에 자세를 고쳐 잡던 그날도 그랬다. 자욱한 담배 연기, 짜장면 그릇, 플라스틱 재떨이. 90년대 직장인의 토요일 오후는 그렇게 평화롭게 저물어가는 듯했다. 그 순간, 당구장 문이 열리며 익숙한 실루엣이 들어섰다. 부장님이었다. 큐대를 든 모두의 동작이 순간 멈췄다.
‘당구도 치지 않는 부장님은 가끔 당구장까지 와서 내일 출근을 명령하는 일이 가끔 있었다.’
머릿속에서 경고등이 울렸다. 우리는 오소리 굴처럼 담배 연기가 자욱한 사무실에서 아침마다 여직원들이 닦아준 재떨이를 채우며 그와 함께 일했다. 그의 주말 술친구가 되어주기 위해 일요일을 반납해야 하는 일도 잦았다. 토요일 오후의 짧은 해방감은 늘 그의 그림자에 쫓겼다.
“어이, 김 대리. 당구 재밌나?” 부장님이 넉살 좋게 웃으며 다가왔다. 큐대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 네, 부장님. 점심 겸 잠시…”
“그래, 근데 내일 뭐 하나?”
올 것이 왔다. 피하고 싶었던 그 질문. 이 질문의 끝에는 늘 고주망태가 된 일요일 밤과, 시골에서 갓 올라와 주말마저 직장에 뺏긴 남편을 홀로 기다리는 젊은 아내의 처량한 얼굴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 일요일도 망했구나.’ 결국 입이 떨어졌다. “네, 별일 없습니다.” “그러면 내일 나와서 나랑 같이 일 좀 하세.” “네, 알겠습니다.” 내 대답에 부장님은 만족한 듯 웃으며 당구장을 나갔다. 선배가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고생해라.” 그 말은 마치 사형 선고처럼 들렸다.
시간이 흘러 5년간의 세월을 보냈던 독산동 사옥이 매각되면서 소위 오렌지족이 활보하는 강남으로 사무실을 이전했다. 많은 것이 바뀌었다. 건물은 당연히 금연이었고, 여직원들의 유니폼도, 책상 위 재떨이도 사라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부장님의 주말 호출이 없어졌다. 그 부장님이 다른 부서로 전배를 간 덕분이었다.
요즘도 가끔 그 시절 선배들과 만나 옛 시절을 회상한다. 여전히 모두 말술이지만, 예전처럼 무리하지는 않는다. 누군가 ‘코너집’ 외상 장부 이야기를 꺼내자 모두가 웃음을 터뜨린다. 부장님에게 불려 나가 고주망태가 되었던 나의 일요일들을 위로라도 하듯, 선배가 잔을 채워준다. 세월을 이기는 장사가 없다고 하지 않는가. 술도, 사람도, 끈질겼던 그 시절의 풍경도 시간 앞에서는 순해지는 모양이다.
그나저나 독산동 코너집의 주인아줌마는 아직도 장사를 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