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반(小盤)

작은 상에 담긴 우주

by 수요일엔 비

낯선 도시를 여행할 때, 저의 발길이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오래 머무는 곳은 의외로 화려한 관광지가 아닌 평범한 가구 전시장이나 생필품 가게입니다. 그곳에는 그 지역 사람들의 일상이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기묘한 형태로 실용성을 극대화한 주방 도구나, 탐미적일 만큼 아름다운 디자인의 가전제품들을 보며 소유욕보다는 순수한 감상의 즐거움을 느낍니다. ‘참 볼만한 사물이구나.’ 하는 생각. 특히 나무 가구의 이음새와 만듦새, 결을 따라 흐르는 매끄러운 질감, 그리고 주방 가구의 차갑고 빛나는 금속성이 주는 대비는 제게 늘 치명적인 유혹으로 다가옵니다. 그것은 사물을 넘어 한 시대의 기술과 미감, 그리고 삶의 방식이 응축된 하나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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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금의 수많은 가구 중에서도 유독 제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우리의 ‘소반(小盤)’입니다. 지금이야 온 가족이 커다란 4인용 식탁에 둘러앉아 왁자지껄 식사를 하는 것이 당연한 풍경이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에게는 ‘1인 1 소반’의 문화가 있었습니다. 변변치 않은 살림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상을 앞에 두고 식사를 하는 모습. 밥 한 그릇과 간장 종지, 그리고 짜디짠 짠지 한 조각이 전부인 낡은 흑백 사진 속에서도, 그 소박한 격식은 가난 속에서도 지키고자 했던 한 사람의 존엄을 느끼게 합니다. 그 모습에서 저는 우리네 삶의 ‘질박함’을 보았습니다. 꾸밈없고 거칠지만 그 안에 단단한 심지를 품고 있는, 그런 삶의 태도 말입니다.


박물관 유리관 너머에서 만난 소반의 세계는 생각보다 훨씬 다채롭고 깊었습니다. 그저 ‘작은 밥상’ 정도로만 여겼던 소반이 지역마다 저마다의 멋과 특색을 뽐내고 있었습니다. 상판의 모양과 다리 형태에 따라 호랑이 다리를 닮은 ‘호족반(虎足盤)’, 강아지 다리 모양의 ‘구족반(狗足盤)’, 그리고 통영, 나주, 해주 등 각 지역의 이름을 딴 ‘통영반’, ‘나주반’, ‘해주반’으로 나뉘는 것을 보며 그 섬세한 분류와 미감에 새삼 감탄했던 기억이 납니다. 견고하면서도 날렵한 선의 흐름, 상판을 받치는 다리의 유려한 곡선, 나무의 결을 살린 소박한 장식 속에서 저는 물건에 깃든 장인의 숨결과 사용하는 사람을 향한 배려를 읽었습니다. 박물관에 전시된 것이 전부는 아니었을 겁니다. 이후 70~80년대에는 나무 대신 철제로 만들어진 간편한 접이식 원형 소반이 집집마다 구비되어 그 몫을 톡톡히 해내던 시절도 있었지요. 어머니의 손에 들려 안방으로, 건넌방으로 부지런히 오가던 그 동그란 철제 소반 또한 우리 기억 속의 소중한 소반임이 틀림없습니다.


소반이 지닌 소박한 존엄을 생각하다 보면, 문득 국민학교 시절의 씁쓸한 기억 하나가 떠오릅니다. 새 학년이 되면 으레 나눠주던 ‘가정환경조사서’.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무지막지한 문서였습니다. TV, 냉장고, 세탁기, 침대, 피아노, 전화기… 온갖 가재도구의 유무를 표기하게 하고, 부모님의 학력과 직업, 월수입까지 세세하게 적어내도록 했습니다. 집안의 살림살이가 그 집 아이의 수준을 판단하는 척도가 되던 시절. 친구 집에는 있지만 우리 집에는 없는 가재도구 목록 앞에서 어린 마음에도 주눅이 들곤 했습니다. 개인의 세계와 존엄은 ‘소유’의 목록으로 환원되었고, 국가는 그렇게 아이들을 통해 각 가정의 경제 수준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등급을 매겼습니다.


‘1인 1 소반’이 한 사람의 우주를 존중하는 문화였다면, 가정환경조사서는 그 우주를 물질적 잣대로 난폭하게 재단하는 폭력이었습니다. 밥 한 그릇과 김치 한 조각일지언정, 독상을 받는다는 것은 온전한 개인으로 존중받는다는 의미였습니다. 하지만 가정환경조사서 위에서 우리는 존중받는 개인이 아닌, ‘TV 있는 집 아이’와 ‘없는 집 아이’로 분류될 뿐이었습니다.


세상은 더욱 풍요로워졌고, 이제 가정환경조사서와 같은 노골적인 문서는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목록으로 서로를 재단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어떤 차를 타는지, 어느 동네에 사는지, 어떤 브랜드의 옷을 입는지를 통해 그 사람의 ‘수준’을 가늠합니다. 소유의 목록은 더욱 길고 화려해졌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한 사람의 본질과 내면보다는 그가 가진 배경과 사물에 더 집중하게 되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자꾸만 소반으로 눈길이 돌아갑니다. 군더더기 없는 형태, 소박하지만 단단한 만듦새, 그리고 한 사람을 위해 오롯이 존재하는 그 쓰임새. 소반이 보여주는 질박한 삶의 태도는, 더 많이 소유하는 것으로 증명하는 삶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긍정하는 삶의 가치를 되새기게 합니다. 화려한 장식장이나 값비싼 소파가 아닌, 작고 낮은 소반 하나에서 삶의 격과 멋을 찾았던 우리네 선조들처럼, 저 또한 물질의 홍수 속에서 나만의 소박한 중심을 지키는 삶을 추구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비록 남루해 보일지라도, 한 사람의 우주를 온전히 담아낼 수 있는 가장 크고 깊은 그릇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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