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먼로!
다들 애쓴다. 100세 시대라니 외면에 신경을 안 쓸 수가 없다. 유사 이래 여성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이제 남자들도 그루밍에 시간과 돈을 아끼지 않는다. 굵어진 주름살을 펴고, 새치든 뭐든 흰머리를 박멸한다. 퀴퀴한 냄새를 감추려는 오데코롱 비즈니스는 활황이다. 세월을 정통으로 맞았다, 혹은 비껴갔다는 말들이 유독 씁쓸하게 들리는 시대다.
나의 부단한 노력은 20년 넘게 다닌 헬스장에서 이루어진다. 건강 유지라는 거창한 목표보다는, 이른 새벽 원거리 출퇴근의 지루함을 피하려다 보니 생긴 오랜 습관이다.
오늘 아침, 쇠 냄새와 땀 냄새가 섞인 라커룸에서 박씨를 만났다. 그는 거울 앞에서 자기 얼굴을 꼼꼼히 살피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아이고, 김 선생. 이거 봐. 어젯밤에 라면 먹고 잤더니 주름이 자글자글해. 이건 뭐 세월을 정통으로 맞는 수준이 아니야. 아주 K.O. 펀치를 맞았어.”
‘세월을 정통으로 맞았다.’ 참 씁쓸한 말이다. 온갖 신산을 다 겪고도 유전자의 힘으로 세월을 비껴간 자가 있는가 하면, 베짱이처럼 살아왔음에도 노안과 깊은 주름을 얻는 건 또 웬 말인가. 그의 얼굴에 새겨진 고생의 흔적이 그의 삶의 무게와 꼭 정비례하는 것은 아닐 터였다.
“그래서 큰맘 먹고 이거 하나 질렀잖아.” 박씨는 고급스러워 보이는 향수병을 꺼내 보이며 말했다. “퀴퀴한 아저씨 냄새라도 좀 덮어야지. 다들 이렇게 애쓰는데 나만 처질 수 있나.”
그때, 의욕 넘치는 젊은 트레이너가 지나가며 외쳤다. “회원님들! 오늘 하체 불태우셔야죠! 노화는 하체부터! 한계를 넘어서야 진짜 운동입니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한계를 넘는 순간, 내 관절은 돌아오지 않는 강을 건널 것이다.’ AI가 인류의 지능을 뛰어넘는 특이점(Singularity), 사건의 지평선(Event Horizon)을 넘어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는 순간처럼, 인생에도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이 있다. 불가역성. 어찌 보면 슬프지만, 그래서 참 다행인 일이다. 그 치열했던 기억과 반복될 것 같은 지루함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으니까.
헬스장을 나와 차에 오르자 라디오에서 심상치 않은 소식이 흘러나왔다. 이상 고온과 가뭄, 집중호우 등이 부른 대형 재해 이야기였다. 인간의 안이함이 만들어낸 재해. 수십, 수백 년이 걸려야 겨우 상흔이 아문다고 했다.
문득 깨달았다. 노화를 막으려는 우리의 노력이, 저 재해를 입은 자연과 닮았다는 것을. 한번 재해를 당한 자연은 결코 그 시절의 자연으로 돌아갈 수 없다. 기후와 토양, 모든 조건이 변했기에 겉모습만 겨우 회복했을 뿐, 본래의 모습은 영원히 잃어버린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주름을 펴고 흰머리를 감춰도, 스무 살의 그 얼굴이 아닌 것처럼. 세월에 이길 장수는 아무도 없다.
먼 훗날, 낡아버린 우리의 외모를 보며 젊은 AI가 ‘빈티지’라는 새로운 매력을 발견해 줄지도 모르겠다며 실없는 상상을 해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오늘은 왠지 메릴린 먼로가 나른하게 불렀던 ‘돌아오지 않는 강(River of No Return)’을 닳아빠진 LP판으로 듣고 싶다. 칙칙 거리는 잡음 속에서, 되돌릴 수 없는 모든 것들의 아름다움을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