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테의 강

동사서독

by 수요일엔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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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로의 깊은 골목, 바(Bar) ‘망각’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십 년 넘게 드나들었지만, 이곳의 낡은 가구와 먼지 쌓인 술병들은 단 하루도 변한 적이 없었다. 나는 늘 같은 자리에 앉아 위스키를 주문한다. 사람들은 무언가를 잊기 위해 술을 마신다지만, 나는 반대다. 잊지 않기 위해, 희미해지는 기억의 윤곽을 붙잡아두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그날, 삐걱이는 문소리와 함께 낯익은 그림자가 들어섰다. H군. 20여 년을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젊은 시절, 내 모든 것을 앗아간 것만 같았던 남자. 언제나 동쪽에서 떠오르는 해처럼 기세등등했고, 나는 서쪽으로 기우는 해처럼 그의 그늘 아래 있었다. 그는 바쁘게 세상을 누비는 동안, 나는 이 바에 앉아 과거를 곱씹었다.

그가 내 맞은편에 말없이 앉았다. 세월은 그의 얼굴에도 깊은 계곡을 파놓았지만, 눈빛만은 여전했다.


“오랜만이군.”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게. 여긴 어쩐 일인가. 자네는 잊을 기억 같은 건 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나의 비아냥에 그는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그때, 바텐더가 묵직한 자기(磁器) 호리병 하나를 우리 사이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라벨 하나 없는 병. ‘망각’의 주인장만 내어놓는다는 전설 속의 술이었다.

“취생몽사(醉生夢死)입니다. 마시면 가장 잊고 싶은 기억을 잊게 된다는 술이죠. 딱 한 잔씩만 드립니다.”

주인장의 말에 H의 눈이 흔들렸다. 그는 잠시 나를 쳐다보더니, 이내 결심한 듯 자기 앞으로 잔을 끌어당겼다.

“자네는 안 마시나?” “나는 기억을 잃는다는 술은 마시지 않네. 구양봉처럼.”

나는 왕가위의 영화 속 대사를 읊조렸다. H는 피식 웃더니, 잔을 채웠다. 독한 향이 코를 찔렀다.

“난 마셔야겠어. 황약사처럼. 지긋지긋하거든.”


그는 단숨에 잔을 비웠다. 나는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TV 드라마에서 기억상실은 얼마나 편리한 장치인가. 모든 복잡한 서사를 단번에 지워버리는 요술방망이. 하지만 현실의 기억은 다르다. 아픈 기억은 삶을 갉아먹고, 좋았던 기억은 돌아갈 수 없기에 우리를 슬프게 한다. 나는 H의 얼굴에서 그 모든 피로를 읽었다. 선별적 기억 상실 능력이란 감히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우리는 단어 하나, 향기 한 줄기에도 속절없이 과거로 소환되는 나약한 존재일 뿐이다.


한참의 침묵이 흘렀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먼저 가보겠네.” 그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망각의 강을 건넌 자의 얼굴이었을까.

“그래.”

그가 바를 나선 뒤, 나는 바텐더에게 물었다. “저 술, 정말 효과가 있습니까?”

바텐더는 조용히 빈 잔을 치우며 대답했다. “글쎄요. 어떤 분은 효과가 있다고 하고, 어떤 분은 그저 독한 술일 뿐이라고 하더군요.”


나는 웃었다. 결국 ‘인자심동(仁者心動)’이다. 움직이는 것은 깃발도, 바람도, 술의 효능도 아니다. 흔들리고, 믿고, 그리고 잊으려는 그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

나는 내 앞에 놓인 잔을 들었다. H가 마신 것은 레테의 강물이었을까, 아니면 그냥 독한 위스키였을까. 상관없었다. 그는 ‘잊겠다’고 선택했고, 나는 ‘기억하겠다’고 선택했다.


나는 그의 부재(不在)를 위해, 그리고 나의 부재하지 않음을 위해 조용히 잔을 비웠다. 바깥에서는 어느새 짙어진 가을의 밤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이 부는 건지, 내 마음이 부는 건지 알 수 없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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