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에서

by 수요일엔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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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만우절, 거짓말처럼 장국영이 죽었다. 그 선하지만 서늘했던 눈매와 소년 같은 미소는 그렇게 한 시대의 끝을 알리며 추락했다. 1956년생이니 살아있다면 예순아홉. 제임스 딘이나 메릴린 먼로가 그랬듯, 그는 가장 빛나는 청춘의 모습으로 우리 뇌리에 박제되었다. 어쩌면 멋지게 늙어가는 모습보다, 영원한 청춘의 초상으로 남는 것이 더 강렬한 법인지도 모른다. 굵고 짧게 살 것인가, 가늘고 길게 살 것인가. 애초에 우리에게 선택권 따위는 없다.


대학 시절부터 10년 넘게 어울렸던 친구들이 있다. 지독한 음주와 흡연에도 다들 타고난 강골이라며 서로의 건강을 장담하곤 했다. 그중 인천에서 건설업을 하던 L군의 와병 소식이 들려온 것은, 그가 마흔을 갓 넘긴 어느 봄날이었다. 위암 말기라고 했다.

부산의 친구들까지 모두 모여 그의 병실을 찾았다. 오랜 투병으로 깡마른 얼굴이었지만, 그가 내민 손을 잡는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뼈만 남은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악력(握力)이 청년의 그것처럼 단단했다. 그는 내 손을 꽉 잡고, 말기암 환자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의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살고 싶다.”

그 한마디에 병실 안의 모두가 침묵했다. 그의 말은 삶에 대한 처절한 갈망이자, 죽음이라는 현실에 대한 마지막 저항이었다. 하지만 그의 강인했던 악력도 시간의 흐름을 붙잡지는 못했다. 그는 그날 이후 열흘도 안 되어 세상을 떠났다.


어차피 우리 모두는 필멸의 존재다.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는 흐릿하다. 죽은 자는 산 자의 기억 속에 살고, 산 자는 언제든 죽은 자의 명패를 달 수 있다. L군의 죽음 이후, 삶의 길고 짧음이 얼마나 부질없는지를 다시 한번 생각했다.


늦여름, 나는 잔디밭 한 평을 떼어 만든 작은 텃밭에 배추 모종 여섯 포기를 심었다. 상추나 고추는 별다른 노력 없이도 잘 자라더니, 유독 단맛이 도는 배추와 대추나무에는 벌레들이 극성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일주일도 안 되어 배추 모종은 낡아빠진 헝겊처럼 구멍이 숭숭 뚫렸다.

나는 다이소에서 사 온 병충해 약을 일주일 간격으로 뿌려주기 시작했다. 흙의 깊이도 얕고, 퇴비나 붕소 같은 사전 작업도 제대로 하지 않았으니, 이번 배추 농사는 아마 실패로 끝날 확률이 높다. 낡은 헝겊 조각이 되어버린 연약한 잎사귀를 보고 있자니, 병상에서 마지막 힘을 그러모으던 친구 L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의 단단했던 악력. “살고 싶다”던 절박한 속삭임. 지금 내 눈앞의 이 작은 배추 모종들도, 수많은 벌레들의 공격 속에서 그와 똑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살아남고 싶다고.


나는 약을 다 뿌리고, 구멍 뚫린 배추 이파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어차피 거둘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이 필멸의 텃밭에서, 나는 죽어가는 생명이 아닌,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생명을 보고 있었다.


“힘내라.”


나의 작은 응원이, 부디 저 연약한 녀석들에게 닿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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