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총

그날의 찰나

by 수요일엔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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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뱅 이후 찰나의 순간에 우주가 형성되고, 지금도 끝없이 팽창한다고 한다. 수억 분의 일 확률로 지구가 골디락스 존에 놓여 수십억 년 생명이 진화해 왔다. 그 혼돈, 케이오스 속에도 우리가 보지 못하는 질서가 있다고 한다. 엉킨 실타래 같아 보이지만, 나름의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움직임을 통해 지금의 내가 여기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나는 한국 시리즈는 물론이고 세상 뉴스에도 별 관심이 없다. 어차피 세상은 내가 아니더라도 효율적으로 돌아간다. 빙 둘러가는 것처럼 보이고, 때로는 왜곡된 현상처럼 느껴지지만, 영원의 흐름 속에서 찰나의 엉킴 따위는 대수롭지 않은 것임을 안다. 감정의 기복조차 우주적으로는 비효율적인 사치일 뿐이다.

하지만 어제, 굳이 TV를 켜고 한국 시리즈 3차전을 봤다. 전 직장과의 인연으로 LG를 응원했지만 패했다. 모든 결과는 순리대로 흘러갈 뿐. 내 인생도 3차전에서 진 기분이었다.


나는 며칠 전 사직서를 낸 기억을 떠올린다. 목마른 심정으로 다시 뛰어든 직장이었다. 단물도 아니었고, 사약도 아니었지만, 맞지 않는 옷임은 몇 개월 지나지 않아 알았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물려받은 재산도 없고, 특별한 재주도 없는 나는 월급쟁이 외엔 선택지가 없었으니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덥석 물었지만… 차라리 뱉어내니 시원한지 뭔지. 알량한 쉼이 있을 거라 생각하니 당장은 나쁘지 않았다. 감정의 기복조차 우주적으로는 효율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전화위복. 10여 년 전의 일이다. 그때 그 일이 없었다면, 친구는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렀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사건 이후, 다소의 아픔은 있었지만, 친구는 쑥쑥 자라 그 분야의 전문가에서 벗어나 어엿한 회사 대표가 되었다. 한 분야 전문가로서의 성장에 한계가 있는 직종이라 늘 목마름에 시달리던 야심 가득한 녀석이었다. 지금의 모습은 정말 전화위복이라는 말이 실감 난다. 그의 삶도 우주의 질서 속에서 한 찰나의 엉킴을 거쳐 순리대로 흘러간 것일까. 친구와의 전화 통화에서 어제의 야구 경기 패배와 나의 퇴직 소식을 전했다. 친구는 나의 결정을 응원하며, 자신의 '전화위복'을 상기시켜 주었다. 그때 문득 떠오른 것은 그 결정을 하고 나서 그 친구와 각자의 길을 택해 돌아섰던 그날의 기억이었다. 그때 그 친구가 다른 길을 택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그는 없었을 터였다.


경주 천마총. 155호 고분. 우리에게는 금관과 수많은 부장품이 출토되어 꽤나 알려진 곳이다. 하지만 내게 그곳은, 그 먼 옛날 그 아이와 각자의 길을 택해 돌아섰던, 찰나의 이별이 박제된 곳이다. 그때 그 아이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혹은 내가 그 운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지금쯤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으려나.


효율 중심의 우주론이나 물리학적 차원에서 인간 세상은 온통 부조리로 가득해 보인다. 때로는 엉뚱하고, 때로는 비효율적이며, 때로는 억울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결국은 순리대로 흘러간다. 어제의 야구 경기처럼, 친구의 전화위복처럼, 그리고 나의 퇴직처럼. 그리고 천마총 앞에서 각자의 길을 택했던 그날의 찰나처럼.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이다. 혼돈 속에서도 질서를 찾으려 애쓰고, 부조리 속에서도 순리를 받아들이는 것. 우주적인 찰나 속에서 나의 작은 존재가 헤매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또한 거대한 흐름의 일부임을 인정하는 것. 퇴직 후의 알량한 쉼 속에서, 나는 천마총이라는 과거의 이정표와 우주의 무한한 팽창, 그리고 나의 작은 선택들을 동시에 생각한다. 모든 것은 결국, 나만의 찰나 속에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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