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의 주문

9회말 투아웃

by 수요일엔 비
jGoeCgMge0J-Cc42HhT_yw.jpg 구글에서 발췌

“인생은 9회말 투아웃부터.”

우리는 이 극적인 반전의 가능성을 사랑한다. 절체절명의 순간 터지는 역전 드라마 속에서 삶의 묘미를 찾고, 스스로를 다잡는 희망의 주문으로 삼는다.


하지만 이 낭만적인 격언은 야구장을 벗어나면 차갑게 식어버린다. '노력하면 된다'는 격려보다 '애초에 정해져 있다'는 냉소가 지배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수저론'이 그 냉소의 중심에 있다. 금수저와 흙수저는 경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출발선이 다르다. 9회말 역전의 전제는 동등한 경기를 치러왔다는 것인데, 이 레이스에서 '역전'은 사치처럼 들린다.


서울 아파트 평균 가격 12억, 15억. 누군가에게는 숫자지만 흙수저에게는 절망의 좌표다. 월 300만 원씩 숨도 쉬지 않고 저축해도, 12억짜리 집을 사려면 30년 이상이 걸린다. 스물일곱에 취업해도 환갑이 가까워야 겨우 돈을 모을 수 있다는 비현실적인 계산. 물가 상승, 금리, 세금은 모두 무시한 이상적인 시나리오다.

부동산 뉴스 헤드라인 '서울 아파트 평균 12억 돌파'를 보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9회말 투아웃이라…. 스코어가 100대 0인데, 무슨 역전인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금수저는 1회부터 홈을 밟고 시작하는 경기처럼 보이는데, 나는 낡은 배트 하나 들고 타석에 서 있기도 버거운 형국이었다.


어릴 적 야구부 시절, 남들이 좋은 장비를 들고 올 때 나는 버려진 장비를 주워 썼다. 아무리 연습해도 결과는 '파울' 아니면 '삼진'. 지금도 마찬가지다. 서울 아파트 가격 그래프가 가파르게 솟아 있는 스마트폰 화면을 보며 허탈하게 웃음이 나왔다. 파울이라도 칠 수 있으면 다행이겠다 싶었다. 배트가 부러질까 두려워 제대로 휘두르지도 못하는 꼴이니, 홈런은 꿈도 못 꿀 이야기였다.


빈 캔맥주를 다시 들어 흔들어보지만 텅 빈 소리만 난다. 어쩌면 '9회말 투아웃'의 진정한 의미는 '승리'나 '역전'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것은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 위에서, 남들이 알아주는 화려한 역전승은 아닐지라도, 나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게 마지막 공까지 눈을 뜨고 지켜보겠다는 '태도'에 관한 말일 것이다. 흙수저가 금수저를 이기는 요원한 꿈을 꾸기보다, 그저 묵묵히 나의 스윙을 하겠다는 처절한 의지.


오늘도 수많은 흙수저들이 각자의 9회말 투아웃을 맞이하고 있다. 이미 스코어는 기울고 눈앞의 벽은 너무나 높지만, 그들은 타석을 떠나지 않는다.


그들의 배트가 홈런을 만들어내지는 못할지라도, 그저 '파울'이라도 쳐내며 다음 공을 기다리는 그 끈질김이야말로, 우리가 이 격언을 포기하지 못하는 진짜 이유일 것이다. 절망의 숫자들이 가득한 이 시대에, 그 처절한 '태도'만이 유일한 희망의 주문으로 남아있다.


이전 19화천마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