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연습(Ⅱ)

by 수요일엔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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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개의 네이버 카페 목록을 스크롤하다 문득 시간의 퇴적을 실감합니다. 20여 년의 세월이 묻은 카페도, 얼마 전 호기심에 가입한 카페도 있습니다. 대부분은 유령처럼 흔적만 남았거나 문을 닫았습니다. 활동하지 않는 이 디지털 기록들은 마치 주인을 잃은 껍데기처럼, 과거의 나를 희미하게 증명하고 있습니다.


며칠 전, 대학 동기와 긴 통화를 했습니다. 은퇴 후 소일거리로 시작한 경비 업무가 3년이 되어가니 이제는 시들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 고향인 남해로 내려갈 채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농사를 짓든, 산불 감시 업무를 하든 새로운 삶을 꾸리겠다는 포부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진짜 걱정은 익숙하지 않은 농사일이 아니었습니다. 아흔이 훌쩍 넘으신 노부모님과 다시 함께 살게 되는 것, 그분들의 '잔소리와 참견'을 견뎌내는 것이 낯선 농기구보다 더 두렵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철이 덜 들었다'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우리의 대화는 자연스레 삶의 마지막 장(章)으로 흘러갔습니다. "만약 우리가 마지막을 선택할 수 있다면."

최근 가입한 '은퇴 후 50년'이라는 카페가 떠올랐습니다. 그곳은 말 그대로 인생의 후반전을 맞이한 이들의 수다 공간입니다. 그곳에서 본 '안락사'에 대한 글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수천만 원을 들여 스위스로 향하는 비행기. 생명 유지 장치에 의지해 그저 숨만 붙어 있는 상태에 과연 '존엄'이 존재하는가.


미국 시리즈물 <블랙 미러>의 한 에피소드는 기묘한 질문을 던집니다. 머나먼 우주를 탐험하는 비행사가 자신의 정신을 지구로 전송합니다. 그곳에서는 자신을 복제한 AI가 지상의 삶을 대신 살아주며, 비행사의 지독한 고독을 달래줍니다. 뇌가 살아있고, 즉 '정신'이 온전하다면 육체는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저 정신을 담는 일시적인 '껍데기'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안락사에 대한 고민은 이 '정신'과 '껍데기'의 분리에서 출발합니다. 만약 나의 육체가 쇠락하며 나의 온전한 정신마저 갉아먹기 시작한다면, 차라리 그 온전한 정신이 스스로 껍데기의 작동을 멈추게 하는 행위. 그것이야말로 내 정신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존엄한 기여는 아닐까요.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문득 친구가 내려갈 남해가 선명하게 그려졌습니다. 나 역시 남해의 푸른 바다와 눈부신 하늘 아래, 연초록 시금치를 키우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아흔이 넘은 노부모의 그 끝없는 잔소리와 참견에도 꿋꿋이 인내하는 아들이 되고 싶어 졌습니다. 어쩌면 '철이 든다'는 것은, 나의 정신이 이 '껍데기'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의 쇠락해 가는 육체뿐만 아니라, 나를 둘러싼 낡고 불편한 관계들까지도 끌어안는 것.


친구는 여전히 그 참견이 싫다고 했습니다. 그는 아직 자신의 껍데기와, 부모라는 또 다른 껍데기와의 연결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모양입니다. 스스로 마지막을 '선택'하길 꿈꾸는 나의 고뇌와, 부모의 참견을 '거부'하는 친구의 고민은, 결국 삶이라는 껍데기를 대하는 서로 다른 태도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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