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복 전성시대
지금은 양복 입은 직장인이 많이 줄었다. 금융권이나 수입차 딜러 정도일까. 하지만 내가 직장생활을 하던 30여 년 전만 해도, 지하철이나 버스 안은 온통 넥타이를 맨 샐러리맨들이었다. 자율복장이 일상화된 지금은 오히려 옷을 차려입기가 더 어려운 것인지도 모른다. 양복이라 해봐야 그레이나 네이비 일색에 넥타이나 셔츠 정도만 바꿔 입어도 분위기가 달라지는, 일종의 교복 같은 느낌이었다.
당시 직장이 옷을 만들어서 파는 곳이라 이 수많은 양복들이 얼마나 팔릴까를 계산해 본 적이 있다. 연간 70~80만 쌍이 결혼을 하던 시기라, 한 번의 결혼식에 신랑을 포함한 양가 어르신, 도련님 등 4~5벌의 양복이 필요했다. 얼추 많게는 400만 착의 양복이 필요하다고 여겨지던, 그야말로 양복 전성시대였다. 백화점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코너가 신사복이었고, 십수 개 브랜드들이 저마다 입어주기를 바라면서 폼나게 지내던 시절이었다.
제일모직, 반도패션, 캠브리지 등 수위권을 다투는 브랜드들이 매 시즌 성과에 따라 코너 위치 변동에 우위를 점하기 위해 용쟁호투하던 시절이었다. 신사복 코너를 맡은 소장들은 손님 확보와 매출 증대에 혈안이었다. 나는 늘 2등 브랜드에 몸담고 있었기에 1등에 목말랐다. 브랜드가 지닌 명성과 고객들의 '안목'에 밀리는 우리 브랜드에 대해 늘 열등감을 갖곤 했다.
유독 강남의 한 대형 백화점 신사복 코너만큼은 항상 1등을 놓치지 않았다. 그 코너의 소장은 작고 땅딸막했지만 다부진 체격과 바싹 깎은 깍두기 머리, 포마드를 바른 단정하면서도 강한 모습으로 후배 사원들을 진두지휘했다. 그의 리더십 덕분에 그 백화점 신사복 코너만큼은 항상 1등을 고수했다. 연말이면 우수 매니저 포상을 독차지했고, 다른 매장 매니저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다.
"김 소장님, 이번 달도 대박이시네요! 역시 강남은 뭔가 다르긴 달라요!" "허허, 운이 좋아서 그런 겁니다. 다 우리 팀원들이 열심히 뛰어준 덕이죠."
그는 항상 겸손하게 말했지만, 그의 눈빛에는 1등의 자부심과 알 수 없는 서늘함이 공존했다. 그는 평소에도 어느 회사 사장님 못지않은 '가오'와 '포스'로 씀씀이가 적지 않았다. 후배들에게 한턱낼 때도 늘 최고급 일식집이나 룸살롱을 찾곤 했다. "매출이 곧 인격이야!" 그의 입버릇처럼 후배들은 그의 씀씀이를 '1등 소장의 카리스마'로 받아들였다.
내가 그 회사를 이직하고 몇 년 후, 우연찮게 들른 그 매장에서 소장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꽤 많은 돈을 빌렸고, 일부는 횡령했으며, 지금은 행방불명이라는 말이었다. 1등을 유지하기 위한 선매출과 가매출로 월간 목표를 맞추는 방식을 하다 보니, 어느새 순매출과 가매출의 격차를 메꾸기가 어려워졌고, 평소의 과도한 씀씀이가 결국 파국을 부른 것이었다. 1등의 그림자는 예상보다 훨씬 어두웠다.
오랜만에 양복을 입은 신사분을 교대역 앞에서 보고 나니, 그 시절의 해프닝이 떠오른다. 양복 전성시대, 모두가 '폼'을 좇던 그 시절, 1등이라는 허울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던 한 남자의 비극. 그는 옷을 팔았지만, 결국 자신을 팔아버린 것은 아닐까.
양복이 사라진 지금, 우리는 오히려 더 자유로워졌을까? 아니면 '보이는 것'에 대한 다른 형태의 집착 속에서 또 다른 1등의 그림자를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패션의 역설처럼, 옷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려 했던 그 시절의 열망과 그로 인한 비극은, 시대를 넘어선 인간 본연의 욕망과 마주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