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막막함에 대하여
아버지는 스물두 살에 나를 낳았다. 그리고 만 서른다섯 살이던 봄날, 홀아비가 되셨다. 열두 살, 여덟 살, 네 살. 세 명의 어린 자식을 두고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셨다. 어릴 적 피난 시절에 너무 고생을 많이 하셔서 '골병이 들어 몹쓸 병에 걸렸다'라고 외할머니는 주름진 얼굴에 쓸쓸한 표정으로 우리를 보며 혀를 차곤 하셨다.
나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상을 치르고 난 홀아비로서, 이 어린 세 명의 아이들을 건사해야 할 그 막막함에 대하여. 당시 아버지의 눈빛 속에 담겼을 망연자실함과 막중한 책임감을, 이제 내가 그 나이를 훌쩍 넘긴 뒤에야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나는 열두 살, 국민학교 5학년 봄날에 어머니를 여의었다. 늘 머리가 아프다며 다리 건너 소나무 숲을 지나 하나밖에 없는 약국에 '뇌신'이라는 두통약을 사 오라고 심부름을 시키던 그 엄마가 돌아가셨다. 어머니의 형제는 삼 남 삼녀였지만, 장녀가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어머니가 차녀임에도 사실상 장녀 역할을 하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새벽, 나를 부둥켜안고 울던 이모의 체온이 아직도 어렴풋이 기억난다.
생활력이 강한 아버지는 어머니 상을 치르고 일주일도 채 안 되어 생활 전선에 복귀하셨다. 그 빈자리는 한동안 친할머니가 우리 삼 형제를 돌보아 주셨다. 몇 년 동안 여러 명의 여인들이 '엄마' 노릇을 하겠다고 왔지만, 줄줄이 어린아이들만 있는 막막한 삶의 모습에 이내 떠나곤 했다. 그나마 열 해 남짓을 같이 살다가, 아이들이 장성한 모습을 보고서는 아버지가 집을 나갔다. 마음에 맞는 새로운 분과 살기 위해 떠나셨지만, 생활비는 꼬박꼬박 대주셨다. 덕분에 세 형제는 학교도 다니고 취직도 하며, 그렇게 각자의 삶을 살면서 성장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하여 객지 생활을 하면서 어언 예순을 넘긴 지금 생각해 보니, 참으로 인생은 우여곡절과 기막힘의 연속이었다. 각 상황이나 고비에 다른 선택을 했다면 우리들 형제의 삶은 어떤 전개가 되었을까. 그나마 다들 결혼하여 가정을 이룬 지금에야 그동안 우리를 음으로 양으로 도와준 분들이 생각난다. 서른 살 초반에 홀아비가 된 아버지의 그 막막함과 무던함이 우리를 현재에 이르게 한 가장 큰 버팀목이었고, 꽤나 오랜 시간 우리 곁에 계셨던 친할머니. 나이 드셔서 성당 언덕을 걸어 올라가기 힘들어하실 때 가끔 업어 드렸던 기억이 난다. 내가 가면 측은하다고 못내 눈물을 감추시던 외할머니. 늘 맛있는 것을 해 먹이고 싶어 하시던 그 할머니의 작은 키가 여전히 그립다.
이제 여든이 훌쩍 넘긴 연세, 아버지는 귀도 보청기에 의지하고, 치아 건강도 나쁘고, 기억력마저 감퇴하며 노년의 각종 증상에 힘들어하신다. 그리고 예순이 넘은 아들인 내게, 그 시절의 막막함과는 또 다른 무게의 하소연을 털어놓으신다.
“아이고, 이제는 사는 것도 힘들어.” “어디 아픈 데는 없으세요?” “다리가 쑤시고, 머리는 자꾸 잊어버리고… 밥맛도 없어.”
한때 세 명의 어린 자식을 짊어지고 묵묵히 걷던 그 젊은 아버지는, 이제 세월의 무게에 지쳐 주저앉아 있다.
그때의 나는 아버지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가늠조차 하지 못했지만, 지금의 나는 아버지의 육체적 고통과 존재의 쓸쓸함을 어렴풋이 이해한다. 홀로 남겨진 막막함이 인생의 시작이었다면, 이제는 모든 것이 서서히 사라지는 또 다른 막막함과 싸우고 계신 것이다. 아버지의 긴 인생은, 어쩌면 멈추지 않는 막막함의 연속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고독한 책임감과 굽이쳐온 세월이, 예순이 넘은 아들의 마음속에 아릿하게 스며든다. 그리고 그 모든 세월 속에서 스쳐 지나간 수많은 사랑과 희생들이, 나의 삶을 지탱해 온 든든한 뿌리였음을 비로소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