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에 실려
파리를 여행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몽쥬약국'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거나, 직접 들러본 경험이 있을 겁니다. 오늘날 한국의 올리브영처럼, 의약품보다는 온갖 스킨케어, 헤어, 바디 제품으로 가득한 독특한 공간이죠. 20여 년 전 제가 방문했을 때도, 그곳은 백인들보다는 아시아 관광객들로 늘 붐볐습니다. 저마다 장바구니에 무언가를 가득 담고 일행과 이야기꽃을 피우는 모습에 시장처럼 왁자지껄했죠. 저 또한 지인들의 부탁을 받은 제품들을 찾느라 정신이 없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당시만 해도 선진국 프랑스의 뷰티 산업은 한국 여성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환율 차이가 컸음에도 국내 수입가보다는 20~30% 저렴했고, 품질은 차치하더라도 입소문만으로 전설이 된 제품들이 진열장을 가득 채운 모습은 남자인 제가 보기에도 신세계였습니다.
세월이 흘러 한국에서도 여가 시간이 늘고 자신을 가꾸는 문화가 확산되면서 뷰티 산업은 폭발적으로 성장했습니다. 2000년대 초 올리브영을 시작으로 왓슨스(현 랄라블라), 롭스 같은 뷰티 전문점들이 우후죽순 생겨나며 K-여심을 사로잡았고, 이내 한국을 찾는 외국인들의 필수 방문 코스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2019년, '뷰티 멀티숍의 정점'이라 불리던 세포라가 드디어 한국에 상륙했습니다. 시작은 창대했지만 그 끝은 미미했습니다. 불과 5년 만에 철수를 선언한 것입니다. 세계적인 브랜드를 다 갖추었음에도, 다양하고 까다로운 한국 소비자들의 마음을 얻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이는 비단 세포라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글로벌 명성만 믿고 한국 시장의 특수성을 이해하지 못한 채 섣불리 뛰어들었다가 쓴맛을 본 브랜드는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은, 바로 어제 올리브영이 사상 최대의 매출과 영업이익을 발표했다는 소식입니다. 그 성공의 핵심 요인 중 하나가 바로 외국인 관광객들의 구매였다고 합니다. 외국의 유수 기업들은 고전하다 떠나는 이 시장에서, 오히려 K-뷰티, K-푸드는 전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비비고' 만두와 '불닭볶음면'의 세계적인 인기를 보십시오. 한때 검은 종이라며 외면받던 김은 이제 건강식품으로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갑니다.
용비어천가의 한 구절처럼,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법'입니다. 가장 한국적인 정서와 취향이 글로벌 시대에는 오히려 독보적인 '다양성'으로 인정받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힘이 단단한 문화로 자리 잡기까지는 아직 갈 길이 큽니다. 꾸준히 실력을 키우고 업력을 쌓아야만 합니다.
최근 다이소가 비타민 판매를 시작하자 약사회가 반발했고, 결국 제약사들이 납품을 중단했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하지만 다이소의 저렴하고 소용량인 화장품들은 1인 가구 시대의 흐름을 타고 이미 그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올리브영의 눈부신 성공을 보며, 문득 20여 년 전 파리 골목의 그 작은 약국을 떠올립니다. 선배 세대로부터 들어왔던 그 명성이 2025년 지금도 여전하다는 사실은 묘한 감상을 남깁니다. 점점 몸집을 키우고 세포라처럼 되려는 듯한 올리브영의 정책이 과연 지금 세대에게도 통할지는 의문입니다. 이미 가격 면에서는 예전만큼 매력적이지 않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그 틈을 다이소가 파고들고 있으니까요.
한국의 산업들이 유행의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백 년, 천 년 가는 기업으로 성장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패션 업계에 오래 몸담았던 저 역시, 수많은 브랜드가 잠깐의 트렌드만 좇다 사라지는 것을 숱하게 봐왔습니다. 지금껏 살아남은 브랜드를 꼽아보면 열 손가락에도 모자랄 정도입니다. 부디 기본에 충실하며 뿌리와 줄기를 단단히 하고, 얕은 이익이 아닌 고객과 브랜드를 바라보는 진정한 기업들이 많아지기를 소망합니다.
폭염이 절정입니다. 100여 년 만에 찾아온 기온이라고 하던데, 매년 갱신될 것 같아 아찔합니다.
세상은 여전히 어지럽고, 비타민이라도 한 알 챙겨 먹어야 할까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