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볼과 밥벌이

by 수요일엔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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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직장의 문을 닫고 나왔을 때, 내게 주어진 것은 무한한 해방감이었다. 지난 수십 년간의 노고에 대한 당연한 보상이라 여겼다. 처음 몇 달은 그야말로 달콤했다. 휴일과 평일의 경계가 무너진 삶. 알람 없이 눈을 뜨고, 발길 닿는 대로 산에 오르고, 훌쩍 떠나 한 달 살이를 해보고,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바람을 갈랐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2년 남짓 그렇게 하릴없이 지내다 보니, 자유가 주는 포만감 대신 알 수 없는 허기가 밀려왔다. 단조로운 일상이 주는 공허함이었다. 매일이 휴일이니, 휴일이 주는 특유의 안락함조차 맛이 밋밋해져 버렸다.

우연한 기회에 한 회사의 고문 역할을 맡게 되었다. 현역 시절만큼 치열하지는 않지만, 다시 정해진 시간에 출근을 하고 업무의 긴장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놀라운 것은 그다음이었다. 평일의 번잡함이 다시 시작되자, 주말이 예전처럼 달콤하게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땀 흘린 뒤 마시는 냉수처럼, 삶의 텐션이 있어야 휴식의 의미도 되살아난다는 사실이 못내 씁쓸하면서도 반가웠다.

오늘도 나는 새벽 공기를 마시며 집을 나선다. 어쩔 수 없는 '밥벌이의 본능'이 다시 나의 하루를 깨우고 있다.


“뭐든지 닥치면 할 수 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들은 여전히 유효한 듯하면서도, 때로는 틀린 말이 되기도 한다.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정교해졌다. 어설픈 술수나 거짓말은 통하지 않는다. 예전처럼 신문사에 전화해 사실 여부를 따지던 시대는 지났다. 우리 손에는 과거의 기준으로 보면 슈퍼컴퓨터나 다름없는 기계가 들려 있다.

이 작은 기계는 이제 단순한 정보 수집을 넘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여 우리에게 최적의 답을 제시한다. 때로는 동반자처럼, 때로는 어두운 밤바다의 등대처럼 길을 밝혀준다. 기술의 발전은 아이러니한 상황도 만들어낸다. 불과 몇 년 전, 온 나라가 코딩 열풍에 휩싸였었다. 중국의 백만 코딩 인력을 부러워하며 전 국민이 코딩을 배워야 할 것 같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30여 년 전의 코볼이나 C+가 사어(死語)가 되었듯, 이제는 복잡한 코딩 언어 대신 일상의 언어로 AI에게 명령을 내린다. 정교한 프롬프트 한 줄이면 그림이 그려지고 게임이 만들어지는 세상, 바야흐로 기술보다는 창의력이 필요한 시절이 도래했다.


하지만 이토록 완벽해 보이는 기술의 시대에도, 인간은 여전히 참으로 나약한 존재다. 오늘 집을 나서며 이것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영원히 살 것처럼 오늘 하루를 시작하지만, 그 시작은 늘 자잘한 걱정들로 가득 차 있다. 출근길의 막히는 도로 사정, 어제 마무리 짓지 못한 업무, 불투명한 장래와 노후, 껄끄러운 인간관계까지. 손 안의 슈퍼컴퓨터가 우주의 이치를 알려준다 한들, 당장 내 앞의 사소한 불안조차 말끔히 씻어내지 못하는 것이 우리네 삶이다.


다시 새벽 출근길에 오르며 생각한다. AI가 코딩을 대신하고 기계가 생각을 대신해 주는 세상이 와도, 결국 삶의 밀도를 결정하는 것은 인간 고유의 리듬일지도 모른다고. 평일의 고단함이 있어야 주말의 안식이 달콤하듯, 우리는 여전히 부딪히고 걱정하고 또 무언가를 해내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들이다. 최첨단의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여전히 밥벌이의 본능에 충실해야 하는, 이 모순적이고도 인간적인 새벽길 위에서 나는 오늘도 하루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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