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그림자

by 수요일엔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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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시절, 영하 27도를 찍던 중대본부 앞 온도계를 보며 첫 휴가를 나왔던 기억이 있다. 정을 대고 해머를 내리쳐야 간신히 펙이 박히던 동계 훈련장. 밤새 텐트 안에서 뿜어낸 입김이 하얗게 서리가 되어 내리던 그 혹독했던 시절, 눈은 그저 '하늘에서 내리는 하얀 쓰레기'였다. 쓸고 돌아서면 또 쌓여있던, 주말만 골라 내리던 그 지긋지긋한 눈.


도심 아파트에 살 때는 까맣게 잊고 지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이미 관리사무소 아저씨들이 부지런히 길을 터놓았고, 이면도로 가로수에 소복이 쌓인 눈은 캐럴이라도 틀어야 할 것 같은 낭만의 결정체였다. "와, 눈 온다!" 하며 베란다에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던 그 시절.


그 낭만의 대가를 3년 전부터 전원생활을 하며 혹독하게 치르는 중이다. 오랜 직장 생활에 지친 몸과 맘을 달랜답시고 덜컥 저지른 전원행이었다. 봄이면 객토하고 상추 심고, 길냥이 밥 주며 덕도 쌓는 목가적인 삶을 꿈꿨다. 하지만 겨울이 오면 나는 '낭만 자연인'에서 '제설 작업반장'으로 돌변한다.

우리 집은 언덕 너머 비포장도로를 타고 올라와야 닿는다. 눈이 조금이라도 내리면 귀가도, 출타도 봉쇄된다. 넉가래를 들고 언덕길을 오르내리다 보면 입에서 단내가 나고, 도심 시절의 낭만은 눈 녹듯 사라진다. 전원생활 3년 차가 내린 결론은 명확하다. 겨울 눈의 성분은 낭만 9%, 불편함과 노동 91%로 구성되어 있다. 대략 난감이다.


올겨울 첫눈이 내렸을 때, 호기롭게 차를 끌고 나갔다가 언덕길 중간에 갇혀 3시간을 허비했다. 바퀴는 헛돌고 내 속도 헛돌았다. "다시는 눈 오면 안 나간다!" 맹세했다. 그런데 참 묘한 심사다. 예년과 달리 눈 소식이 뜸하니 슬그머니 그 하얀 쓰레기가 보고 싶어 지는 거다. 넉가래질할 걱정에 몸서리치면서도 창밖을 기웃거리는 이 이중적인 마음이라니. 인간의 간사함은 영하 27도 추위보다 더 지독한 모양이다.


요즘 날씨가 참 묘하다. 미래학자들은 수십 년 뒤엔 겨울이 보름 남짓이고 일 년의 절반 이상이 여름일 거라 경고한다. 어릴 적 삼한사온(三寒四溫)의 리듬은 깨진 지 오래다. 사흘 춥고 나흘 따뜻하며 얼추 균형을 맞춰주던, 죽기 직전에 살짝 봐주는 듯한 그 배려 깊은(?) 날씨 패턴이 그립다.


날씨만큼이나 묘하고 종잡을 수 없는 것이 있으니, 바로 내 주식 계좌다. 주식 경력은 꽤 오래되었다. 전체 기간을 통틀어 따져보면 여전히 플러스 수익 구간이지만, 현재 계좌 상황만 놓고 보면 심각한 '파란불(마이너스)'이다.

남들은 코스피가 3천을 넘어 5천 시대를 바라본다며 샴페인을 터뜨릴 준비를 하는데, 내 계좌는 왜 나 홀로 빙하기를 맞이하고 있는가. 아마 이 글을 읽는 분들 중 절반은 "쯧쯧, 종목 선정을 잘못했네" 하실 테고, 나머지 절반은 "내 얘기네" 하며 무릎을 치실 것이다.

이게 참 묘한 현실이다. 시장 전체 지수는 오르는데 내 종목은 내린다. 알고 보면 선택받은 소수의 주도주 몇 놈이 멱살을 잡고 시장을 끌고 올라가기 때문이다. 마치 강남을 비롯한 몇몇 '똘똘한 한 채' 지역이 전체 부동산 가격 상승을 주도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평균의 함정이다. 전체가 나아지면 모두가 나아지는 것처럼 보이는 착시 현상. 하지만 뉴스의 헤드라인이 화려할수록, 지수가 최고점을 경신할수록, 그 대열에 끼지 못한 소외감은 더 깊어진다. 빛이 밝을수록 그림자가 더 짙어지는 법이다.


겨울 날씨와 주식 시장은 닮았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흐름 속에 있다. 눈이 너무 와서 길에 갇히면 욕이 나오지만, 막상 안 오면 기다려지듯, 주식 시장이 폭락하면 공포에 떨지만, 또 너무 오르면 고소공포증을 느낀다.


오늘도 나는 일기예보와 주식 시황판을 번갈아 본다. 내일은 눈이 올까? 내일은 내 종목에 빨간불이 켜질까? 폭설에 대비해 넉가래를 현관 앞에 꺼내 두고, 혹시 모를 반등에 대비해 '존버' 정신을 가다듬는다. 날씨도, 주식도, 인생도 참으로 묘하게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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