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춘 시계

안전핀

by 수요일엔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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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 벽시계는 10시 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주방의 전자시계는 10시 4분, 내 손목시계는 10시 6분이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손목시계의 용두를 뽑았다. 집안의 모든 시간을 통일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은 시작부터 삐걱거렸다. 기준이 되는 스마트폰 시계를 보며 용두를 돌리고 누르는 그 찰나의 시차 때문에, 아무리 애를 써도 집안의 시계들은 제각각 다른 ‘현재’를 살았다.


“차라리 멈춘 시계가 낫지. 하루에 두 번은 정확히 맞잖아.”


언젠가 친구가 던진 우스갯소리가 떠올랐다. 현상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1분 빠르거나 늦어서 영원히 평행선을 달리는 시계보다, 죽어버린 그 시점이 하루에 두 번 진실과 마주하는 멈춘 시계가 나을 수도 있다.

시계 용두를 만지작거리며 아인슈타인을 생각했다. 중력이 강한 곳에서는 시간이 느리게 간다지. 빛의 속도로 달리면 시간은 멈춘다지. 지금 내 방의 중력은 지구 평균의 몇 배쯤 되는 걸까. 나를 짓누르는 이 압박감 속에서 시간은 엿가락처럼 늘어지고 있었다. 오묘한 일이다.


'전송' 버튼을 누른 지 30분이 지났다. 그것은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뽑아본 실탄 수류탄의 안전핀이었다.

군 시절, 훈련소에서 연습용 수류탄은 던져봤지만 진짜는 만져본 적도 없었다. 강재구 소령의 비극적인 희생 이후 훈련 방식이 바뀌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나는, 회사 비리 장부가 담긴 파일의 전송 버튼을 누름으로써, 내 손아귀의 안전 손잡이를 놓아버린 상태였다.

이제 손을 펴기만 하면 상황은 종료된다. 아니, 시작된다. 폭발과 파편, 그리고 비명.

“괜찮아. 아무 일도 아니야.”

어젯밤, 술잔을 기울이며 김 부장이 했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그는 내 고민을 듣고는, 마치 실수로 뽑은 안전핀을 다시 꽂아 넣고 푹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게 괜찮아질 거라는 듯 말했다. 그는 멈춘 시계 같은 사람이었다. 변화를 거부하고 현재의 안락함에 고정된 채, 세상이 자신에게 맞춰주기만을 기다리는.

나는 김 부장의 말을 믿고 싶었다. 정말 안전핀을 도로 꽂을 수만 있다면, 그래서 이 뇌관이 작동하는 소리를 멈출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징-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10시 35분. 30분 전에 보낸 내부 고발 메일의 수신 확인 알림이 아니었다. 회사 메신저의 단체 대화방 알림이었다.

[긴급 공지: 외부 유출 보안 관련하여 전 직원 PC 검열이 있을 예정입니다. 협조 바랍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공지 발신자는 감사팀장이 아니었다. 내가 유일하게 믿고 상담했던, 그래서 안전핀을 다시 꽂으라며 나를 다독였던 김 부장이었다.

반응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내가 수류탄을 쥐고 벌벌 떠는 동안, 동조해 줄 거라 믿었던 김 부장은 재빨리 저쪽 편에 서서 내 손목을 비틀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멈춘 시계 같던 그가 자신에게 유리한 시간이 오자 누구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스멀스멀 배신의 그림자가 방안을 덮쳤다. 나는 아직 시계도 다 맞추지 못했는데, 세상은 나보다 훨씬 빠르게, 그리고 비열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손바닥에 땀이 찼다. 더 이상 안전핀을 다시 꽂을 방법은 없었다. 나는 제각각 다른 시간을 가리키는 벽시계와 주방 시계를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쥐고 있던 손아귀에 힘을 뺐다.


대략 난감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제 폭발은 피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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