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정의

by 수요일엔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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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이 세상에 '로그인'하고 싶어서 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눈 떠보니 '응애'였고, 정신 차려보니 김 씨 집안 둘째 아들이었다. 부모님이라고 나를 쇼핑 카트에 담듯 골랐을까. 그저 어쩌다 보니 서로가 서로에게 '가족'이라는 이름의 랜덤 박스로 배달된 거다.

출생이라는 첫 단추부터 내 의지가 아니었으니, 그 이후의 삶도 비슷하게 흘러갔다. 내가 선택했다기보다는, 거대한 파도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선택지 A와 B 사이에서 허우적거린 느낌이랄까. 학교, 직장, 결혼... 마치 식당에 갔는데 메뉴판은 구경도 못 하고 주방장이 내키는 대로 주는 '오마카세'를 평생 강제로 먹어온 기분이다. 심지어 맛이 없을 때도 억지로 삼켜야 했다.


요즘 나는 이 근원적인 '떠밀림'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밤마다 불교 경전 강의를 듣는다. 유튜브 알고리즘이 나를 인도한 해탈의 길이다. 저명하신 스님의 근엄한 목소리가 스마트폰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온다. "삶은 고(苦)이며, 번뇌에서 벗어나야..."

처음엔 미간을 찌푸리며 집중한다. 그래, 이 지긋지긋한 수동적인 삶의 고리를 끊을 진리를 찾아보자! 하지만 5분을 넘기기 힘들다. 스님의 에둘러 말하기 화법과 했던 말 또 하는 도돌이표식 설법은, 솔직히 말하면 현존하는 그 어떤 수면제보다 강력하다. 나는 깨달음을 얻으려다 꿀잠을 얻는다. 어쩌면 이게 진정한 해탈일지도 모르겠다. 불면의 밤을 '기절'로 구원받는 것.

그렇게 선잠에 들어서도 무의식 저편에서는 죽음에 대한 생각이 둥둥 떠다닌다. 나이가 드니 죽음 그 자체보다 더 무서운 게 생겼다. 바로 '내 의지대로 죽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다.


꽤 오래전 국회에서 안락사(조력 존엄사) 관련 법안이 발의되었다는 뉴스를 봤다. 솔직히 좀 놀랐다. 어떤 나라인가.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 受之父母)', 즉 부모님이 주신 몸에 털끝 하나 건드리는 것도 불효라며 바득바득 우기던 유교의 나라 아니던가. 그런 나라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할 권리를 논하다니, 세상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 하긴, 이제는 부모가 물려준 머리카락보다 임플란트 박힌 잇몸이 더 많은 시대니 철학도 바뀌어야지.

예전에 죽어가던 친구 녀석 병문안을 갔을 때가 생각난다. 앙상하게 마른 손으로 내 손을 부서져라 쥐며 녀석은 말했다. "살고 싶다." 그 처절한 생의 의지 앞에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르다. 나는 더 살고 싶은 욕망보다, 비참하게 질질 끌려가며 죽음을 맞이하는 상황이 더 두렵다. 온몸에 튜브를 꽂고, 기계 소리에 의존해 숨만 붙어있는 채로,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태로 가족들에게 고통을 분담시키는 마지막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내 삶의 시작 메뉴가 '주방장 특선(랜덤)'이었다면, 적어도 마지막 디저트 메뉴만큼은 내가 직접 고르고 싶다. 그게 아주 쓰디쓴 에스프레소 한 잔일지라도 말이다.


철학적이든, 사회학적이든, 경제학적이든 그 어떤 거창한 이유를 들이대더라도, 결국 내가 원하는 건 하나다. '존엄한 마침표'. 질병의 고통이 내 영혼을 완전히 파괴하기 전에, 더 이상 인간다운 삶을 유지할 수 없다는 판단이 섰을 때, 나 스스로 "여기까지!"라고 외치고 레드카드를 꺼낼 수 있는 권리.

그것이 평생을 내 의지와 상관없이 떠밀려 살아온 내 인생에 대한 마지막 예의이자, 유일하게 주체적인 반항이 아닐까.


오늘 밤도 스님의 강의를 튼다. "집착을 버려라, 그러면 자유로워질 것이니..."

스님의 목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려온다. 나는 스르르 눈을 감으며 생각한다. 그래요 스님, 삶에 대한 집착은 버릴 테니, 마지막 가는 길 버튼 누를 권리만 좀 챙겨주쇼. 내 인생 마지막 옵션은 '사용자 정의'로 설정해 두고 싶으니까. 쿨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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