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금실 좋은 부부
지하철에서 젊은 사람들 전화하는 걸 보면 참 재밌을 때가 있어요. 그전까지는 무표정이었는데, 전화받으며 얼굴에 미소가 피면서 갑자기 어린애처럼 말투가 바뀝니다.
“다기, 어디양? 난 디하떨.(자기, 어디야? 난 지하철)”
“다기양, 밥 먹어떵? 뭐 먹어떵?(자기야, 밥 먹었어? 뭐 먹었어?)”
이런 식으로 혀 짧은 소리를 내면 ‘아, 애인하고 통화하는구나’ 짐작할 수가 있지요. 여성뿐 아니라 남성도 평소의 굵은 목소리와 점잖은 톤과는 다르게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와 말투가 됩니다.
신혼부부들도 둘 사이에 여전히 그렇게 혀 짧은 소리를 냅니다.
“여봉, 나와떵.(여보, 나왔어)”, “어머낭, 일띡 왔넹?(어머나, 일찍 왔네?)”
이런 말투 듣기 어떠세요? 혹시 아주 거북스러우신가요?
그런데 미국 오클라호마 주립대 연구에 따르면, 연인이나 부부의 3분의 2가 이런 아기 말투를 쓴다고 합니다. 어쩌면 여기까지 읽고, 그 많은 인구 안에 자신이 들어있지 않다는 걸 새삼 깨닫고 ‘에이, 설마?’ 이러시는 분들도 많으실 것 같은데, 물론 이런 단서가 붙습니다. ‘서로에게 애정을 느낄 때.’
하긴 아무리 연인이나 신혼부부라고 해도 싸울 때 이런 말투는 안 쓰겠지요. 그리고 젊은 부부뿐 아니라 머리가 허연 노부부 가운데도 여전히 금실이 좋은 분들은, 비록 그렇게 닭살 돋는 아기 말투는 아니어도, 여느 사람들과 말할 때와는 차이가 느껴지는, 상당히 다정한 말투로 말씀하시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가정의 달 5월에는 가족과 관련된 기념일이 여럿 있는데, 그중 마지막에 있는 가족 관련 기념일, 5월 21일이 ‘부부의 날’입니다. 부부의 날이 5월 21일이 된 데는, 가정의 달인 5월에 둘이 하나가 된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예로부터 부부는 ‘일심동체’라고 하지요. 부부 사이는 두 사람이라도 마음도 하나 몸도 하나라는 뜻으로 서로 굳게 결합하는 걸 이르는 말입니다.
그런데 금실 좋은 어르신들 보면 둘이 하나로 사시기보다, 둘이 둘로 살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격려하고 위로하고, 세상에 둘도 없는 한편이 되어 주십니다. 물론 사랑은 기본입니다. 젊었을 때처럼 불타는 사랑은 아니지만, 여전히 내 눈에는 내 남편, 내 아내가 최고로 보이는 그런 사랑입니다. 그렇게 둘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는 걸 인정할 때, 하나여야 한다는 강박이나 서운함에서 벗어날 수 있고, 오히려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면서 불타는 사랑보다 더 오래가는 ‘물 같은 사랑’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문득 지난겨울에 극장까지 있는 쇼핑몰에 아마도 70대 중반 이상일 것 같은, 그렇지만 그 연배보다는 왠지 젊게 느껴지는 커플이 손을 꼭 잡고 같이 걸어가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젊은 사람들이라면 부둥켜안고 걸어가도, 하나 이상할 게 없지만, 그 연배에 추운 날씨인데도 각자 주머니에 손을 넣지 않고, 손을 꼭 잡고 걸어가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거든요. 순간 솔직히 '재혼부부인가?'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습니다. 대개 같은 장노년이라고 해도, 결혼한 지 오래된 부부는 애정표현을 잘 안 하지만, 재혼한 부부들은 젊은 사람 못지않게 꽤 적극적으로 하는 편이잖아요. 실제 4050+ 부부들이 패키지여행을 갔을 때, 서로 손잡고 걷거나 팔짱 끼고 걷고, 남편이 아내를 꿀 떨어지는 시선으로 챙기고, 아내가 남편을 귀찮아하지 않고 살뜰하게 챙기는 부부는 십중팔구 재혼부부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도 아니면 그제야 집신짝을 찾아 늦게 결혼한 부부이던가요. 하지만 이내 생각을 바꿨습니다. ‘아냐, 저 나이 부부라고 다정하게 걷지 말란 법 있나? 같이 잘 늙어가는 부부일 거야.’ 이렇게요.
흔히 가을로 가는 길목에서 중년 이상 된 부부가 가을을 가장 먼저 느낄 때가 바로, 배우자가 등이 가렵다면서 등 좀 긁어달라고 할 때라고 합니다. 환절기에는 피부 장벽이 무너지고 피부 노화가 촉진되기 쉬운데, 특히 아침저녁 갑작스러운 찬바람은 금세 피부의 겉과 속을 메마르게 해서 가려움증을 느끼게 하니까요. 문제는 꿀 떨어지게 사랑하던 젊은 시절에는 ‘등 긁어달라’고 하면 등을 긁어주는 것뿐 아니라 '뭐 더 해줄 게 없나' 찾게 되지만, 나이 들면 가렵다고 할 때마다 번번이 등 긁어주는 게 귀찮게 여겨진다는 거지요. 그래서 효자손이라는 걸 사다 놓기도 합니다. 가려운 사람이 스스로 알아서 효자손으로 긁어라 하는 뜻으로요. 물론 가려움이야 효자손도 똑같이 해소시켜 주지만, 부부간의 애틋한 정은 그만큼 감소되겠지요. 등 긁어주면서 이 사람 등이 굽었나도 보고, 또 피부가 어떤지 한번 살펴보게도 되고, 정확히 가려운 데를 찾지 못해 등판을 헤매다가 함께 웃기도 하고, 이런 것들이 모두 생략되는 거잖아요. 짐작하셨겠지만, 금실 좋은 부부는 등 긁어달라고 하면 직접 등도 긁어주고 덤으로 촉촉한 로션도 함께 발라줍니다.
그리고 가만 보면 부부건, 연인이건, 자식이건, 심지어 반려동물이건, 서로에게 애정표현을 잘해주는 대상이 있는 분들이 정말 훨씬 젊게 살고 또 젊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