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 빨간 사추기

애인이 필요한 이유

by 메타럽

젊어서는 가족을 우선순위에 두고 살다가, 세월이 쏜살같이 흘러 내 나이가 믿기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나를 챙겨야겠다고 마음먹은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참 희한한 게 가족을 위해서라면 힘들고 귀찮은 일도 책임감 때문에 얼마든지 다 했는데, 나를 위해서 한다고 생각하면, 귀찮고 꾀가 나서 잘 안 하게 된다고 하지요. 가령 자식이나 손주가 오면 과자 하나도 예쁜 그릇에 담아서 주지만, 내가 먹을 때는 설거지나 과자 부스러기 흘린 것 치우기 싫어서 싱크대 앞에 서서 먹는다는 겁니다.

저는 반려견과의 산책이 그랬습니다. 반려견을 위한다는 생각에 귀찮아도 함께 산책에 나서곤 했습니다. 하루 종일 자기를 데리고 산책하러 나가기를 기다리다가, 저녁때가 되면 더 이상 못 기다리겠다는 듯이 곁에 와서 계속 눈을 마주치면, 그 눈빛에 두 손 두 발 들고 만사 제쳐놓은 채 산책하러 나가야 했습니다. 반려견을 사랑하는 마음이 산책하러 나가기 귀찮은 마음보다 훨씬 더 컸거든요.


그런데 지난 1월 9일 반려견이 제 곁을 떠난 후, 이렇게 산책하기 좋은 계절이 됐는데도, 전 아직 산책하러 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제가 반려견과 함께한 산책은 사랑하는 반려견을 위한 산책이었고, 저 자신한테는 귀찮은 일이었나 봅니다. 그러면서도 전 방송 원고에 ‘내가 나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 누구가 아닌 나 자신을 위해 생활할 수 있도록 내가 나에게 친구가 되어 주세요’라고 썼네요. 제가 쓴 원고대로라면, ‘혼자 산책하러 가기 싫은데.. 아, 귀찮아’ 하고 꾀가 날 때 스스로에게 가장 친한 친구가 돼서 ‘아무개야, 우리 같이 산책하자’ 이렇게 손을 내미는 건데, 솔직히 정작 저한테는 별 효과가 없었습니다. 귀찮은 마음이 더 큰가 봐요.


이런 제 사정을 아는 누가 그러더군요. “그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한테 하는 말이라고 생각해 봐.”

남편은 산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 산책을 독려하는 애인이라도 있어야겠는데, 드라마나 웹 소설의 멋진 남자 주인공이 나한테 하는 말이라고 생각해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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