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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슝이모 Nov 20. 2022

오늘도 새. 하루입니다

태국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며 매일을 새롭게 삽니다.

1. 

대학생 시절, 4학년을 앞두고 휴학을 하고는 캐나다에서 영어 어학연수를 받은 적이 있다. 

그때 영어반 영어 교사는 미소에 수줍음이 가득하며 나긋나긋하게 말하는 전형적인 I형(내향형) 캐나다 여성이었는데 수업 시간만 되면 돌변을 했다.

평소에는 들을 수 없는 엄청난 성량의 목소리를 내지르며 긴 팔다리를 모두 사용하며 교실을 휘젓고 다니는 모습은 무대 위 연극배우와 다를 바 없었다. 

쉬는 시간에 수줍게 미소 짓던 그 사람과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그 시절 그 교사의 화끈한 수업 방식 덕에 나의 영어 울렁증이 사라진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었다.



태국에서 말이 안 통하는 외국인 교사의 신분으로 살면서 종종 그때 그 교사가 떠오른다.

I형 내가 지금 딱 그 모습이니까.

교실은 연극무대요 학생들은 내 열연에 호응해야 하는 관객인 것처럼 느껴지곤 한다.

학생들의 호응이 뜨뜻미지근한 날에는 다음 수업을 기약하며 이를 간다.

‘내 진정 너희를 반응하게 하리라.’ 하는 각오로!

호응 유도를 위해서는 수업에서 칠판 보고 따라 쓰기를 넘어서는 동적인 활동이 필요하다 보니 매 수업마다 색다른 활동을 고민하게 된다.

가히 시청률에 연연하는 나PD급 고민이다.

숨겨왔던 창의성을 탈탈 털어내야 하는 직업이 교사직이었다는 걸, 직접 해보면서 터득한다.

그래서인가. 겉으로는 꽤 단순해 보이는 이 태국 생활의 내부를 잘 살펴보면 어제와 다른 오늘을 살고 있다는 새로움을 매일 경험하고 있는 내가 있다.

하루가. 늘 새 하루다.    

 

2. 

고 1 한국어 전공반 학생들의 수업 시간. 

‘생기발랄’이 측정기로 잴 수 있는 양이라면 고 1 학생들의 그 수치는 측정기의 최고점을 뚫어버리지 않을까. 

당연하다 싶기도 하지만 생기발랄 수치는 고1이 가장 높고 고 3이 되면 생기발랄이 힘을 잃는다. 

고3 아이들에게는 '생기발랄'이 아니라 '시름시름' 혹은 '싫음 싫음'(그냥 모든 게 귀찮고 싫은 증세) 즘으로 바꾸는 게 좋겠다.      



고 1 아이들이 기다리는 교실 문을 여는 순간, 현란한 기운이 교실 밖에까지 쏟아져나온다.

이 아이들의 에너지는 어디까지 솟구칠 수 있을지 사뭇 궁금하다.

그 에너지의 근원이 티끌 없이 무해해서 이를 느낄 때마다 짜릿한 전율이 일곤 한다.

이 반의 장점은 몇몇 아이들의 예의를 갖춘 생기발랄함이 무턱대고 발하는 생기발랄함을 누르고 짧은 시간 내에 반 전체에 빠르게 전염된다는 점이다.

그런 까닭에 수업시간의 야단법석한 소란도 쓱 눈감아주게 된다.


     

오늘은 말하기 활동을 했다. 

이제 막 과거형 동사를 배운 학생들에게 그림카드를 각자 하나씩 뽑게 했다.

그 카드에는 어제 어디에서 누구하고 무엇을 했는지를 대답해야 할 여러 가지 내용들이 그림과 함께 적혀 있다.

그걸 짝과 함께 서로 묻고 답하는 활동이다.     



학생들은 보통 교실 원하는 자리에 자기와 친한 친구들과 앉아서 수업을 받는다. 

뻔한 상황이지만, 앞자리는 대부분 한국어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이 끼리끼리, 뒷자리로 갈수록 한국어 공부가 소홀한 학생들이 끼리끼리 앉아 있다.

이런 짝 활동을 시키면 보통 옆자리 절친들과 짝을 이루어 활동하기 마련인데 뒷자리 학생들의 경우에는 수업 시간 내에 활동을 끝내지 못하는 일이 잦다.     

그래서 이번엔 꾀를 냈다. 

무작위로 짝을 지어주기.

학생들 이름이 모두 적힌 쪽지를 섞은 후, 학생 한 명에게 종이를 두 장씩 뽑아서 새로운 짝을 호명하게 했다.


절친과 헤어지게 되자 소란이 교실을 메우는 가운데 새로운 짝을 찾은 학생들은 말하기 연습을 시작했다.     

"말하기 연습이 끝났으면 선생님한테 와요. 그리고 카드를 안 보고 서로 묻고 답하기를 말해요!"     

외워서 말해야 한다는 미션에 학생들의 비명 데시벨이 옆 반까지 침투할 정도다.      

조금은 어색한 짝이다 보니 한국어를 좀 더 잘하는 쪽에서 덜 잘하는 쪽을 예의를 갖춰 적극적으로 돕는 모습이 포착된다.

어떻게 말하는지, 어떻게 쓰는지, 서로 외운 게 맞는지 확인해주면서.     


서로를 도와가며 연습한 까닭에 40여 명의 학생들이 수업 시간 내에 활동을 모두 무사히 마쳤다. 

이런 짝 활동에서는 늘 낙오자 대열에 끼었던 담비, 하나, 지연이도 새로운 짝과 함께 거뜬하게 임무 완수!

이렇게 활기차고 즐겁게 수업을 마친 날에는 마치 내가 큰 선물을 학생들에게 받은 기분이다.      


오늘은 너희들 모두에게 '참 잘했어요' 도장을 100개씩 마구마구 찍어주고 싶구나.     



3.

고2 한국어 전공반의 수업 시간.

문법 '~부터 ~까지'를 배우고는 주말 일과표 그리기를 했다.

주말에는 몇 시부터 몇 시까지 무엇을 하는지 그려보고 말하는 활동이다.

일과표를 다 그린 학생들이 나와서 내게 검사를 받았는데 가장 눈에 띄는 건 기상천외한 기상시간이었다.

      

아이들을 추궁했다.     

"다정아, 정말 오후 1시에 일어나?"

"정말이에요. 찡찡!(태국어로 정말이라는 뜻)"     


민주는 심지어 새벽 4시에 일어나서 드라마를 본단다.

일과표를 생각 없이 막 그린 거 아니냐는 내 추궁에 토끼를 닮은 민주는 엽기토끼 표 억울한 표정을 짓더니 칠판에 우는 얼굴을 그리고는 제자리로 들어간다.      


넷플릭스와 유튜브 시청에 밤을 잊은 아이들이 태국에도 이리도 많다. 

이 선생님과 주말 밤이 별반 다르지 않다니 참 유감이구나, 얘들아.      


주말 내내 한국어 공부라고 쓴 면화를 또 추궁. 

학생들이 ‘저 선생님은 속고만 살았나 봐’할 판이다.

“진짜야? 주말에 한국어를 이렇게 열심히 공부해? ”

“네. 저 대학교에서 한국어를 전공할 건데요.”

너무 당연한 걸 의심한다는 투의 면화 말에 선생님 머쓱. 

면화의 말이라면 믿어야지. 

면화의 1학기 한국어 성적은 이 반에서 1등이었다.

     

주말에는 쿠키를 만든다는 태연이에게 "쿠키를 만들었다고? 우와~ 선생님도 쿠키 무지 좋아하는데." 하며 은근슬쩍 운을 띄우니 눈치도 빠르지, 다음 시간에 만들어서 가지고 오겠단다.     


이게 웬 교사의 사리사욕이냐 욕하지 마시라.

그저 나는 학생들과 한마디라도 더 나누고 싶어서 안간힘을 쓴 것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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