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검고 노란 해바라기 언덕

PAMPLONA ~ PUENTE LA REINA, 5th Day

by 이작


빰쁠로냐의 나바라(Navarra) 대학에서 세요를 받을 목적으로 오늘은 조금 늦게 출발했다. 오랜만에 하루를 늦게 시작하니 하늘이 환하게 밝아 어색하지만, 일요일이라 그런지 도시의 큰 길가에서도 사람들을 쉽게 찾을 수 없었다.


처음보는 도시에서 길을 찾아내기란 길거리 사람의 수와는 상관없이 쉽지 않다. 게다가 노란 화살표조차 화려한 간판과 광고에 가려져 빰쁠로냐를 빠져 나오는 데만 두 시간이 꼬박 소요됐다. 나바라대학은 도시의 끝에 위치하고 있어서 지나가는 길에 문만 열려 있으면 세요를 받을 수 있겠다고 쉽게 생각했다. 하지만 빰쁠로냐라는 도시는 지금까지 들렀던 마을과는 다르게 한 시간을 넘게 걸어도 끝나지 않았고, 지도에 커다랗게 표시돼 있는 나바라 대학도 보이지 않아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인지 슬슬 불안해 지기 시작했다. 마주치는 사람들은 계속 앞으로만 가라고 한다. 그 길의 끝에 나바라 대학이 있다고 하는데 가는 내내 불안하여 사람을 만날때마다 재차 물어 확인 했다. 사람들의 말처럼 대학은 도시의 끝에 붙어 있었으며 도착했을 때 그 안도감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대학 안에서 도장을 받을 건물을 찾아 다니면서도 일요일이라 성공할 수 있을 지 걱정이었다. 평일 일과시간도 아닌 하필 일요일의 이른 아침이라니. 교내의 화살표를 따라가고 있자니 가장 안쪽 건물 작은 창문 앞에 경찰과 흡사한 복장의 보안담당 직원이 서성거리고 있다. 그에게 길도 물어볼 겸 세요를 받으러 왔다고 하니 창문으로 담당직원을 불러 도장을 찍어 넘겨준다. 개인 생활을 철저히 지키는 스페인 사람들에게 사실 일요일 새벽의 이런 호의는 조금은 의외였지만 이 길을 지키려고 하는 그들의 노력이 보이는 것 같다.






나바라 대학에서 외곽으로 향하는 작은 다리를 지나자 길을 중심으로 왼쪽으로는 노란 해바라기가 멀리 지평선 끝까지 노랗게 덮여있고, 그 반대쪽은 추수 후 태워버린 밀밭이 검은 색으로 나뉘어 있다. 현기증이 난다. 지평선 끝까지의 노랗고 검은색의 단색 평지를 눈으로 따라가자니 묘하게 대조를 이룬 초현실적인 느낌이 잠시 머릿속을 흔들었다. 감정을 읽던 관찰력이 머릿속에서 잠시 혼란을 일으키며 충돌을 일으킨 듯 하다. 어지럽다. 비현실적으로 틀어져 버린듯한 이 장면은 현실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단조로운 2차원 공간에서의 색의 평면 같았다. 입체의 세계에서 순식간에 2차원 도화지로 들어와 버린듯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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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멀미 같은 어지러움을 느끼지 않으려고 바닥을 보며 비틀비틀 걷는다. 길 옆쪽으로 방향을 잘못 걷고 있었는지 문득 발 앞에 해바라기의 굵은 밑둥이 보인다. 줄기를 따라 올려다보니 해바라기가 웃고 있다. ‘꽃이 웃고 있다’라는 촌스런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해바라기가 방긋 웃고 있었다. 눈도 있고, 입도 있고 쟁반만한 해바라기에 누군가 눈과 입을 새겨 두었다. 아래쪽에는 또 다른 노란 해바라기 쟁반에 굵은 화살표가 깊게 새겨져 있었다. 어느 짓궂은 순례자의 표식인 듯 하다. 그 표식을 따라 2차원의 세계 안으로 다시 걸어 들어갔다. 길의 오른쪽으로는 온통 검은 색이다. 거대한 수묵화 붓으로 쓸어간 듯 일괄적으로 검은 색이다. 원근감이 사라진 검은색 지평선의 끝을 보며 걷는 느낌은 답답했다. 숨도 잘 쉬어지지 않는다. 도화지에 갇혀 버린 듯, 검은색과 노란색을 저울질 하며 그 가운데로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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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도 없을듯한 벌판을 지나자니 저 멀리 지평선 끝 능선에 움직이고 있는 아주 작은 물체가 눈에 띈다. 깃발처럼 펄럭이는 것 같기도 하고 돌아가는 것 같기도 한 것이 능선을 따라 띄엄띄엄 비슷한 간격으로 심어져 있다. 그 정체가 궁금해 캠코더를 꺼내 들었다. 망원경을 대신해서 캠코더의 줌 기능이 제격이다. 하얗고 길다란 것 위에 바람개비가 성냥머리보다 작은 크기로 돌아가고 있었다. 전체가 하얀 색으로 칠해져 있는 풍력 발전기였다. 한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넓은 면적에서의 밀, 해바라기 농사와 함께 수많은 풍력 발전기를 이용해 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음식이나 자원이나 어느 것 하나 부족할 것 없는 이 땅을 보니, 문득 사람들로 가득한 서울의 그 좁고 높은 빌딩들이 허무하게 겹쳐진다. 도시를 떠올려도 ‘답답’하고, 이 넓은 허허 벌판을 봐도 ‘답답’하다.


난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성장했고, 그 빠른 도시의 흐름에 맞춰 살아가는 일이 점차 쉬워질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생각과는 정 반대로 점점 어려워 졌다. 그 중 특히 지금 살고 있는 방법이 맞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것이 가장 어렵다. 나조차도 확신이 없는 이 삶을 아이들도 똑같이 강요 받고 있다는 현실이 가장 받아들이기 힘들다. 이 길, 까미노를 걸을 때는 노란 화살표만을 보고 걷지만, 실제 삶에서는 이러한 작은 싸인 조차도 발견할 수가 없다. 정말로 궁금한 것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며, 설사 찾는다 해도 그로 인해 만족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인지 아직 단 1퍼센트의 확신도 없다. 제도교육 속에서 사회가 원하는 화살표를 따라서 살아 왔지만, 남은 것은 허무함과 자신 없는 대답뿐이다.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것이었을까?


캠코더를 접어 넣고 다시 화살표를 따라 터덜터덜 걷기 시작한다. 얼만큼을 걸었을까? 잘 보이지도 않던 풍력 발전기가 어느새 코앞으로 다가와 있다. 바로 앞 산 위에서 커다랗게 돌고 있는 인공 바람개비가 보인다. 그 바람개비 바로 아래 순례자의 조형물이 얼핏 보인다. 그렇다면 이 곳은 ‘용서의 언덕’인 ‘알토 델 페르돈(Alto del Perdon)’일 것이다. 길을 따라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는데 그다지 높은 곳은 아니어서 힘이 들지는 않지만 바람이 무척 심한 곳이다. 이런 곳이니 풍력발전기가 들어왔겠지 하며 한걸음씩 다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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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 가까이 다다르자 순례자의 철제 조형물이 한눈에 들어오며 입구부터 관광객들의 날아가는 모자가 제일 먼저 보인다. 조금 늦더라도 이곳에서 점심을 먹고 출발할 예정이었으나 그늘도 없고 바람이 너무 세다 보니 서있기 조차 어려웠다. 할수없이 점심을 포기하고 날아갈 듯한 모자를 사수하면서 복숭아 하나를 겨우 꺼냈다.


철제 구조물은 순례자들이 나귀를 몰고 깃발과 함께 걷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꽤 유명한 곳이다 보니 머무는 사람들도 많고 택시도 한대 올라와서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다. 언덕 뒤쪽으로는 차가 올라 올 수 있는 아스팔트 길이 보인다. 언덕 정상의 공터에 만들어 놓은 작은 탑 주변에서 복숭아를 먹고, 조형물을 한 바퀴 돌아 내려가기 시작했다.


내내 돌길이지만 돌언덕이 그 세차던 바람을 다 막아주는지 더 이상의 바람은 불지 않는다. 이곳은 마치 전체가 시작부터 돌로 이루어진 산인 듯싶다. 올라갈 때와 마찬가지로 내려가는 길조차 온통 돌이 쌓여 있었고, 발에 채여 튀어 오르는 돌에 여기저기 찍히며 뛰어가듯 내려갔다. 평지에 다다르자 그제서야 다리 여기저기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허벅지고, 종아리고 모두 멍이 들어버렸고, 발목은 안팎으로 여러 차례 꺾이다 보니 감각이 무뎌져 버린 듯 하다.


산 아래까지 내려오니 도로가 점차 넓어지며 넓은 마을이 나타났다. 역시 깔끔하게 정돈 돼 있었다. 길 건너에 음료수 자동판매기가 보이는 넓은 공원 벤치에서 가방과 신발을 벗은 후 주변 수돗가에서 손과 얼굴을 씻었다.


점심으로 미리 사둔 빵과 하몽을 꺼내 샌드위치를 만들고 있을 때 멀리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예전 훌리오에게 소개받았던 김윤식씨였다. 난 평소보다는 조금 늦은 7시쯤 출발했지만 그는 숙소 퇴소 시간인 8시가 넘어 나왔다고 한다. 한 시간의 차이를 극복하고 나타나는 건강한 젊음이 부럽다. 대학 졸업반이라서 취업이나 앞으로의 삶에 대한 고민을 안고 왔지만 항상 긍정적이고 밝아 보인다. 난 바게트 빵을 반으로 가르고 하몽을 넣은 샌드위치를 만들어 윤식씨와 나누어 먹기로 했다. 스페인 전통 햄인 하몽을 처음 먹어본다고 한다. 건조한 바람이 불어 그늘은 선선하고 햇빛은 뜨거웠다.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가이드북에서 추천하는 사설 알베르게에 찾아 들었다. 마을 초입에 있어서 바로 찾을 수 있었으나 수영을 전공했다는 윤식씨는 수영장이 마련돼 있다는 마을 출구 쪽 알베르게에서 묵기로 했다.


순례자여권(크레덴시알)을 제시하고 배정받은 방으로 들어가자 어제 만났던 팻과 그의 딸 새라, 그리고 이전에 잠시 만났던 호주 선생님 클레어가 함께 짐을 풀고 있다. 오랜만에 만난 클레어는 어느새 같은 또래인 새라와 친구가 되어 있었고, 스페인 청년 두 명이 함께 우리 방에 배치가 돼 있었다. 언제 출발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오늘도 같은 방에 묵게 된 것이 신기하고 반갑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사람들을 알아가는 방식이 새로웠다.


샤워와 빨래를 빠르게 마친 후 숙소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보고 나서야 식당을 찾아갔다. 숙소 등록 시 저녁을 뷔페로 제공한다고 하여 나도 모르게 저녁 값을 지불해 버린 터였다. 거의 매 끼니를 슈퍼에서 구입한 빵과 햄으로 샌드위치를 만들어 때우다가 뷔페라고 하니 자연스레 지갑이 열려 버렸다. 이곳에서 즐거운 호기심으로 스페인의 음식들을 경험할 수 있었다. 대부분 처음 보는 음식들이었지만 입맛에는 잘 맞았고 그 맛에 이끌려 오랜만에 과식을 해 버렸다. 함께 식사를 하게 된 클레어와 미국인 제니퍼에게 백발의 수녀에게서 받은 복숭아 이야기를 들려줬고 식사 후 우리 일행 모두의 손에는 뷔페에서 제공하는 복숭아가 하나씩 들려 있었다.






사방에 하얀 천사가 날아 다닌다. 윌리엄부게로의 ‘첫키스’에 등장하는 ‘큐피드와 프쉬케’와 같이 하얗고 통통한 아기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난 그 천사들을 따라 뛰며 쫒아 다닌다.


흩어져있던 천사들이 한곳으로 모이자 서로 속닥속닥 이야기를 하며 날 힐긋힐긋 쳐다본다. 눈빛이 좀 이상하다. 모두가 나를 비웃고 있다. 문득 겁이 나 다른 곳으로 뛰어 달아나 보지만 그 쪽에도 역시 나를 비웃고 있는 한무리의 천사들이 있었다. 갑자기 하늘이 점점 어두워 지며 나뭇가지에 앉아있던 두 마리의 새 중 한 마리가 죽어 땅으로 고꾸라지며 떨어졌다. 당장이라도 숨이 멎을 듯한 답답함이 가슴을 조여왔다. 눈을 떴다. 꿈이었다. 땀과 눈물로 온몸이 젖어 있었고 심장이 마구 뛰었다. 내 몸을 인식하는 순간 다시 잠결에 숨어있던 몸 이곳저곳의 고통이 느껴졌다.


새벽 1시. 대다수의 알베르게는 10시에 정문을 잠그고 그 이후에는 출입이 통제 되어 나갈수도, 들어올 수도 없다. 결국 몸을 질질 끌고 바닥으로 내려와 의식이 없는 좀비처럼 건물 안을 돌아다닌다. 먹먹하고, 슬프고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들었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이 틀림 없었다. 좋지 않은 소식도 들릴 것 같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어제 밤 피곤에 이끌려 미사에 참석하지 않은 일이 떠올랐다.



설마..



며칠 후 가까운 친척집의 몸이 아프던 쌍둥이 중 하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난 천사를 봤던 그날 밤 불안하고 슬픈 마음이 진정 될 때까지 꽤 오랜 시간 동안 알베르게 한쪽에 마련되어 있는 도서관 소파에 멍하게 앉아 시간을 쏟아버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