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그 곳

신들의 세계, 까미노 프랑스길.

by 이작
딸깍



무기력하게 수많은 케이블 TV 채널을 처음부터 끝까지 돌리다 우연히 어느 한 곳에 시선이 고정됐다. 누군가 무거워 보이는 가방을 메고 뿌연 먼지가 날리는 사막 같은 길을 걷고 있었다. 걷고 있는 주변에는 마른 바닥의 흙을 까뒤집어 놓은 듯한 흙빛 밀밭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 사람 이외의 다른 사람들 조차 보이지 않았다. 몇 포기의 말라버린 나무와 흙빛의 베어버린 밀밭이 전부였다. 그 지루해 보이는 길을 흙먼지를 뒤집어쓴 누런 사람이 걷고 있다. 오래 걸어서 다리가 아픈 지, 절뚝거리며 힘들어 보였지만 심지어 그는 웃고 있었다. 저 기억의 끝에서 항상 동경하던 장면이 떠오른다. 어디든, 죽을 때까지 걸어보고 싶어 하던 내 막연한 어릴 적 기억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그 생각이 다시 화면을 따라 움직인다. 정신이 바짝 들고 콧구멍에 바람이 휑하니 들어간다. 감기로 막혀있던 숨통이 한꺼번에 터지는 느낌이다. 화면을 보고 있었지만 그 속의 주인공을 따라 자유롭게 걷고 있었다. 그곳은 산티아고라고 했다. 스페인의 산티아고. 난 마치 수 십 년 만에 처음 고향을 찾은 설렘을 느끼고 있었다.



나…… 저기 가지 못하면 죽을 것 같아……



과자를 들고 있던 손이 마치 처음 본 것처럼 느껴지며, 정신이 맑아졌다. 오늘이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그 작은 조각들을 입으로 하나 하나 가져가 잘근잘근 부숴 버렸다.

매일 밤 입에서 부서지는 과자 따위는 사실 아무 의미도 없었다. 단지 내 의지로 하고 있다고 느낄 수 있는 유일한 행위였던 것 같다. 다음날 옆으로 지나가는 수십, 수백 개의 시곗바늘을 피해 앞으로의 거창한 계획을 포함해서 머릿속으로만 생각하던 의지를 주변에 이메일로 날려 버렸다.


하루하루가 빨랐다. 그나마 쉴 수 있는 날은 그곳만을 위한 시간으로 바뀌어 버렸다. 처음에 당황하던 식구들, 친구들, 주변의 모습은 본격적으로 준비를 시작하니 격려와 응원으로 바뀌어 있다. 한편으로는 저러다 말겠지 하는 생각들도 있는 것 같았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거침없던 준비과정에 제동을 건 것은 의외로 나 자신이었다. 준비를 할 때만 해도 날아가듯 즐겁던 마음속에 슬쩍 불안과 두려움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이제야 비로소 제정신을 차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짜가 가까워 올수록 더욱 불안하다. 이미 인터넷으로 교통편, 숙소 예약 등 필요한 준비는 모두 마친 상태였지만 이상하게 두려웠다. 현실적으로 생각해 볼 때 10년 이상 사무실에 앉아있던 내 몸은 망가질 대로 망가져 하루도 거르지 않고 몇 차례씩 경련이 일어났고, 아침을 맞을 때마다 인사치레처럼 치르는 부어오르는 왼손, 깨질듯한 머리, 허리통증 등이 장거리 트래킹이 가능한 조건은 아니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보다 먼 840킬로미터가량 된다던 그 먼 길을, 무턱대고 나서겠다고 준비하던 그 행동들이 새삼 후회되기도 한다.


떠나기 전날 저녁 샤워를 하며 다시 중얼거렸다.



네가 안 데려가니 내가 찾아가 보지 뭐



사회에 미련이 많은 탓일까? 배낭 속 물건들이 이미 15킬로그램을 훌쩍 넘어섰지만 필요하지 않은 것을 구별할 수 없었다. 일단 필요 없는 것들은 걸으면서 하루하루 정리하기로 한다. 떠나기 전 어머니가 급하게 장갑 한 짝을 챙겨 주신다. 이전에 아버지가 낚시를 다닐 때 사용했던 것으로 몇 번 써보지도 못해서 내가 쓰기에 괜찮을 것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