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마음의 길, 닭의 전설에서 시작되다

NAJERA ~ SANTO DOMINGO de la Calzada, 11

by 이작

눈을 떴다. 역시 새벽이다. 주머니 속 작은 랜턴을 주섬주섬 꺼내 벽 쪽으로 비추고 조용히 짐을 정리했다. 항상 다음날 아침에 입어야 할 옷을 모두 갖춰 입고 잠들기 때문에 모자, 안경 등 간단한 것만 챙긴 후 배낭과 침낭을 질질 끌듯이 들고 나오면 그걸로 끝이었다. 복도로 나와 환한 불빛 아래에서 침낭을 정리하고, 마실 물을 담고, 손이 잘 닿는 곳에는 해충 퇴치제와 썬크림, 작은 물통을 넣는다.


실없는 웃음이 새어 나온다. 이제는 이 생활이 너무 자연스럽다. 마치 평생을 이렇게 살아왔던 것처럼, 또, 손에 아주 익숙한 일들을 반복하는 것처럼 준비하는 시간도 눈에띄게 줄었다.


스틱을 조절하고 있는데 어느새 팻과 새라, 클레어가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오늘은 그들과 함께 걸어 보기로 한다. 어차피 한 명에게 맞춰 걷다 보면 다른 사람들의 페이스가 깨지기 때문에 얼마 가지 못해 다시 찢어져야 하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나의 체력이 다른 사람들과 보조를 맞출 수 있을지 알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도 걷다 보면 이런 식으로 나뉘어져 다음 마을에서 다시 만나곤 하기 때문에 시작점에서 함께 걷는 것에 대해 아무도 부담을 갖고 있지 않았다. 걷다가 힘들면 인사도 없이 그냥 그 자리에 짐을 내리고 쉬면 그만이었다.


모든 일상이 순조롭고 어제보다 다리에 힘이 들어간다. 하루 만에 체력이 좋아지지는 않겠지만 지금 당장 걸을 수 있을 만큼은 회복된 듯 보였다. 하지만 오전을 채 넘기기도 전에 다시 무리에서 뒤쳐지고 말았다. 무거운 배낭이 내가 가는 방향과는 정 반대로 끌어 가는 것 같다. 결국 배낭을 맨 채로 털썩 주저 앉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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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마을인 아소프라(Azofra)에서 빵과 카페콘레체로 간단한 식사를 하고 천천히 길을 나서려는데 길거리 테이블에 동양인 모녀가 앉아 있었다. 어느 나라 사람인지는 분간하기 어렵지만 주변을 많이 경계하는 눈치다.


그들을 지나쳐 마을 끝 포장된 길이 끝나자 바로 진흙길이 시작 됐다. 그제부터 이틀간 내렸던 비의 흔적이었다. 발목까지 빠져 들며 신발을 잡아 끌었다. 양 다리가 모두 무겁다. 다리를 들어올리면 무거운 흙이 한덩어리씩 따라 올라왔다. 건기라는 스페인의 여름에는 어울리지 않게 이틀째 겪고있는 진흙 길이었다.


건조하고 뜨거운 햇빛이 내리쬐던 날보다는 걷기에 수월하지만 훨씬 많은 체력을 요구했다. 한발짝 한발짝 정성 들여 발을 옮기듯, 디딜 곳을 미리 확인한 후에 천천히 내딛어 본다. 얼마간을 걷다 보니 진흙에 빠진 자전거를 싣고 있는 트럭이 보인다. 평소에 순례자들의 옆으로 빠르게 지나가 다음 마을에서 먼저 숙소를 선점하고 있던 자전거들이 오늘은 제 발로 달리지 못하고 있었다. 순례자들이 숙소를 찾을 때 좋은 자리가 남아있지 않은 가장 큰 이유였지만 쌩쌩 지나가는 그 모습은 항상 선망의 대상이었다. 걸어서 5주정도 소요되는 산티아고 길을 자전거라면 3주에 도착 가능하다고 하며 실제로 자전거로 이동하는 사람들을 꽤 많이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신발로 도장을 찍듯 걸어가는 순례자들을 결코 따라 올 수 없을 것이다.





안내책자에서 오늘 도착할 산토도밍고 데라 칼사다(SANTO DOMINGO de la Calzada)에 대해 잠시 찾아본다. 죽었던 닭이 되살아 났다는 믿을 수 없는 전설을 가진 마을이었다.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하루를 지내게 된 순례자를 사랑하게 된 숙소 주인의 딸이 그를 보내지 않기 위해서 거짓으로 도둑질을 했다고 고발을 하게 된다. 이로 인해 사형이 집행 되었지만 순례자의 가족들이 형장을 지나다가 그가 아직 살아있는 것을 알게 되며 영주에게 아들을 풀어달라고 간청한다. 영주는 마침 닭 요리가 올라와 있는 식탁에서 그 말을 듣고는, 아들이 아직도 살아있다면 이 닭 요리가 살아나 우는 것과 같다고 하니 식탁 위의 닭 요리가 벌떡 일어나 울었다고 한다.


이 전설로 인해 마을에 도착하자 마자 닭과 관련된 기념품, 조형물들이 먼저 눈에 보였다. 빵, 쵸코렛등의 기념품들은 모두 닭의 모양을 하고 있었고 숙소의 뒷마당에서 조차 닭을 키우고 있었다. 성당에서도 2층에 닭장을 만들어 미사시간마다 볼 수 있도록 닭장에 불을 켜고 진행을 한다. 누가 봐도 닭의 전설을 가진 마을임을 알 수 있도록 거리 곳곳에 기념품 상점들이 늘어서 있었고, 오래된 건물들이 즐비한 마을은 마치 그 전설 속을 걷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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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광장으로 들어서자 색색의 띠로 포장되듯 묶여 있는 번쩍이는 검은 차와 성당 문 앞에 결혼식을 막 마친 부부가 보인다. 그 부부의 뒤에서 백파이프를 들고 있는 다섯 명의 연주자들이 멋들어진 음악을 연주하며 드레스를 입은 많은 하객들과 결혼을 축하하고 있다. 전통의상을 입은 백파이프 연주자들과 그 뒤 고풍스럽고 장엄하게 지어진 성당이 조화를 이루며 신랑을 태우고 들어온 마차의 검고 반짝이는 갈귀를 가진 말들이 잠시 시선을 빼앗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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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을로 들어오면서 이상한 기분이 느껴졌다. 힘들고 지치게만 느껴지던 이 걸음이, 어느새 모든 것이 순조로워 졌고 마치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당연하게 하루하루를 받아들이고 있다. 아직 지겹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처음 이 순례길을 걷기 시작할 때처럼 어떤 특별한 느낌은 느낄 수 없었다.


한 순례자가 말하길, 까미노는 처음부터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걷게 된다고 했다.

처음 시작해서 몸이 적응할 때까지의 육체의 길(Physical), 마음을 다스리는 마음의 길(mind) 그리고 마지막 정신, 영혼의 길(Spiritual)이었다. 난 어제까지 그 처음 적응기인 육체의 길을 걸어왔던 것 같다. 어제 많은 음식을 먹고 하루를 푹 잔 후 일어나보니, 컨디션이 꽤나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오늘은 평상시 걸을 때와 같이 편안했다. 조각나 있던 생각들도 하나씩 맞춰진다. 처음 한 고비를 막 넘긴 기분이었다. 하지만 항상 그렇듯 산을 넘으면 새로운 산이 버티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마을마다 성당에서 세요를 받아도 더 이상 새로울 것은 없는 것 같았다. 육체적으로 적응하게 되니, 이젠 왜 이곳에 있는지 스스로 고민하고 있었다. 마치 습관이 되어버린 것 같은 이 생활을 계속 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회의가 밀려왔다.


몸이 적응하기 시작하자 겹겹으로 포장된 선물의 첫 번째 포장이 뜯어진 것처럼, 진짜로 고민하고 있는 것이 다시 무엇인가에 묶여 있었다.


지금까지 특별히 뭔가 얻은 것도 없는 것 같다. 이 길의 의미는 무엇일까?


숙소에는 어느새 팻과 새라, 클레어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 사람들은 항상 가는 곳마다 같은 숙소에 이미 먼저 와 있곤 했다. 팻과 새라는 각자 짐을 정리하며 내일 마실 물을 배낭에 채우고, 클레어는 항상 그렇듯이 침대에서 편안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