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습관이 돼버린 길 위의 시간에서

SANTO DOMINGO de la Calzada~BELORADO,12

by 이작

하루 종일 흐리다. 다행이다. 걷기에 부담스럽던 쨍쨍한 태양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온통 구름이 가득하고 눈도 부시지 않아 걷기에는 참 좋다.


아침부터 무엇에 쫓기듯 부지런히 걷고 있다. 단지 걷기 좋은 날씨 때문만은 아니었다. 며칠 전부터 맴돌던 생각이 날파리처럼 괴롭혔다. 난 도망이라도 치듯 신발끈을 바짝 조여 매고 잰 걸음으로 걷고 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이 습관 같은 생활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는거지?


마치 생각에 밀리듯 내 몸은 앞으로 휩쓸려 갔다. 잘 다니던 직장도 휴직을 하고 스페인까지 날아와서 기껏 한다는 것이 하루 종일 그냥 걷고, 씻고, 먹고, 자는 것 뿐이라니. 이젠 새로운 거리도, 음식도, 성당도 잘 느껴지지 않는다. 처음에 그나마 가졌었던 새로운 것들에 대한 관심과 기대 조차도 이제는 초라하게 꺼져 거추장스럽게 발길에 채이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800킬로미터를 넘게 걷는 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 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전체 거리의 약 3분의1을 걸었지만 이대로라면 1퍼센트의 의심도 없이 시간만 낭비해 버린 완벽한 실패였다. 나의 일과, 시간을 완벽하게 낭비해 버린 것이었으며 가족에 대한 배신이었다.


두렵다. 그 누구보다 나 자신이 두렵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던 내게 단 하나 남아있는, 단 한그루의 기대 비빌 나무조차 뿌리째 뽑혀버린 느낌이다. 그 두려움에 놀라 뒤돌아 서려 하면 서울에 남아있는 핏덩이 같은 아이들과 가족들의 얼굴이 어느새 눈앞에 어른거렸다.


걷는 내내 마음 한 구석에서 가시 돋친 구슬들이 걷는 발에 맞춰 굴러 다니며 찔러댔는데, 처음부터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모른 척 해버린 가족들의 삶이 그 중 하나였다. 대부분의 아버지들처럼 아이들이 아빠를 잘 못 알아 보더라도 조용히 직장생활을 하면서 매달 들어오는 월급으로 일상을 계획하고 아이들을 키워야 하는 것인지, 그리고 이런 소모적인 삶을 물려줘야 하는 것인지 혼란스럽다. 오늘 밤에도 축축하고 싸늘한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를 듯 하다. 나 지금 후회하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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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마을에 들어서자 산티아고까지 576킬로미터가 남았다는 표지판이 눈에 들어온다. 걷기에는 꽤 먼 거리이나 내게서 작은 변화라도 만들어 내기에는 너무나도 짧게 느껴진다. 하지만 단지 주어진 시간 동안 열심히 걷는 것 이외에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그것은 무책임하게 내 삶을 너무도 단순한 시간과 공간에 내동댕이 치는 것이었지만 달리 생각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