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LORADO ~ AGES, 13th Day
다시 새벽이다.
눈을 뜨자마자 침대에서 내려와 정리를 시작했다. 새벽 5시, 항상 이 시간이었고 침대에서 내려올 때 느껴지는 고통은 내내 익숙해 지지 않는다.
사다리를 디디자 다리가 찌릿찌릿 저려오고, 아킬레스건이 굳어버린 것처럼 뻐근하고 아프다. 매일같이, 매번 쉬었다 걷기 시작할 때에도 30분이상은 이 고통에 적응하기 위한 시간으로 사용됐다.
난 겨우 앞만 보일 정도의 손전등을 꺼내들고 주위를 비췄다. 천천히 걷기 시작해 길에 적응할 무렵에서야 날이 밝으며 작은 마을이 나타났다.
구름에 덮여있는 마을이다. 넓은 벌판 나지막한 동산에 자리잡은 마을에서 내가 서있는쪽으로 안개가 번져오는 것이 보인다. 곧 나를 덮칠듯 빨랐다. 두려웠다. 사방으로 뻗은 끝이 보이지 않는 벌판 한가운데에서 흰색 물감이 물속으로 퍼지듯 내가 서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저 안에선 숨도 쉴 수 없을 것 같은 답답함이 밀려왔다. 뛰어 도망가도 안개의 속도가 너무 빨라서 채 5분도 채 되지 않아 흰 공기에 먹히게 될 것이다.
뒤쪽에서 불쑥 누군가 앞으로 튀어 나갔다. 등에 걸린 빨간 가방이 먼저 눈에 띄었지만 그 가방에서 뒤를 보도록 달려있는 곰 인형이 더욱 주의를 끌었다. 갑작스런 순례자의 등장에 용기를 내서 곰 인형을 따라 안개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을 감고 한쪽 손이 코를 붙잡고 있었는데 살짝 놓아보니-당연한 일이겠지만- 숨을 쉬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빨간가방 곰에 시선을 고정하고 따라가던 난 순간 뒤돌아서는 곰을 보며 흠칫 놀랐다. 곰을 메고 있던 순례자의 얼굴이 보임과 동시에, 무턱대고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묻는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반사적으로 상관 없다고 말하고 얼떨결에 그녀의 모델이 되었다. 영어를 꽤 잘하는 스페인 할머니였고 커다란 렌즈가 붙어있는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 보여주며 말을 걸어왔다. 아들에게서 화해의 선물로 받았다는 곰 인형의 사연이 꽤나 궁금했지만 자세한 언급은 피하는 눈치라서 더 이상 물어볼 수는 없었다.
마을을 지나 다시 걷기 시작한다. 양쪽에 숲이 우거진 돌길을 오전 내내 걸어 산주안(St Juan)에 다다랐다. 이곳에는 내부가 박물관 처럼 꾸며진 커다란 성당이 있었지만, 설명을 읽어봐도 스페인 역사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그 의미를 알 수 없었다.
일단 숙소를 찾기 위해 그늘로 들어가 안내 책자부터 뒤졌다. 한곳을 정하고 일어나려는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팻이 새라, 클레어와 함께 나타났다. 내가 이곳에 머무르겠다고 하니 다음 마을에 훨씬 좋은 알베르게가 있다고 귀띔을 해 준다. 일행들을 떠나 보내고 책을 펴보니 다음 마을까지는 5킬로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이미 하늘에는 따가운 태양이 올라 있다. 구름 한 점 없이 미치도록 깨끗한 날씨였다. 그 날씨 덕이었는지 깊이 생각 하지 않고 다시 배낭을 메고 걷기 시작했다.
마지막까지 구름 한 점 없이 따가운 햇빛이 비췄고 더위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지만 다음 마을인 아게스(AGES)에 도착해 보니 작지만 깨끗한 알베르게가 기다리고 있었다. 마을 입구에 산티아고 518킬로미터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아직도 걸어야 할 길이 한참이다. 이 길을 걷는 것에 대한 확신도 없이 저 많은 길을 지금처럼 걸을 생각을 하니, 끔찍하기까지 하다. 하루 종일 생각 했지만, 걸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어떤 결론도 낼 수 없었다. 하지만 아직은 주어진 시간이 많다고 스스로 위로하며 좀 더 침착하게 생각하고, 기다려 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