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메세타, 내 마음을 만지다

BURGOS ~ HORNILLOS, 15th Day

by 이작


부르고스를 빠져 나오기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났다. 노란 가로등 불빛에 비친 옛 도시의 흔적이 고풍스럽다. 새벽까지 켜놓은 분수에서는 물이 분수밖으로 넘쳐 흘렀고 그 옆을 지나는 순례자들은 새벽부터 차가운 물 세례를 받을까 조심조심 피하며 지나가야 했다.


어젯밤 숙소는 무척 더웠다. 도시의 밤이 항상 그렇듯 덥고, 숨이 막혔고 건물 밖으로 나오니 그나마 상쾌한 공기가 시원하게 느껴졌다. 이 여행을 시작하면서 멋진 도시를 만나면 하루 이틀 여행자처럼 묵어보기로 했던 계획들이 이제는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것조차 사치스럽게 느껴 진다. 나 자신에 대해, 가족에 대해, 저 망망한 노란 밀밭에 보이지 않는 그 커다란 무의식의 존재에게도 죄를 짓는 느낌이다. 아직도 무겁게만 느껴지는 배낭을 메고 묵묵히 걸었다.


처음 출발할 때와는 다르게 순례자들은 여러 길로 나뉘어 걸었다. 이 커다란 도시는 어느 곳으로 가야 할 지 누구에게도 정확히 알려주지 않는다. 도시의 습성이다. 덥고 습한, 퀴퀴한 공기와 미로 같은 길은 한치의 빈틈도 내주지 않고 단지 그 안에 사람들을 가두려고 한다. 몇 번 순례자의 아침식사를 위해 열려있는 바(bar)에서 길을 물어보고 잠시 걷다 보면 다시 길은 사라졌다. 달팽이가 제 껍데기로 숨어들 듯 보이지 않는 도시의 거대한 혓바닥은 다시 처음을 향해 돌고 있었다.


이른 새벽에 잠 못 이루는 백발의 노인들만 길 옆 벤치에서 지나가는 순례자에게 따듯한 웃음으로 용기를 북돋아 주고, 손으로 어깨를 툭툭 치며 무사와 안녕을 빌어준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이곳에서 언어와 같은 전달 방법은 필요 없었다. 내 마음은 그들의 표정을, 손짓을 읽었고, 그 마음은 눈빛으로 타고 들어와 내 가슴을 한 꺼풀씩 덮어주며 상처를 치유하고, 일종의 책임감 같은 것으로도 침착되는 것 같았다.






한 시간을 넘게 걸은 것 같다. 함께 출발한 순례자들은 더 이상 함께가 아니었고, 모두 어디로 갔는지 단 한명도 보이지 않는다. 커다란 도시에서 배출되듯 튕겨나와 어느새 다시 조용한 길을 혼자 걷는다. 어제 버스정류장에서 줄 서 기다리던 순례자들이 떠올랐다. 지옥이라 불리는 메세타지역을 뛰어넘기 위해 길게 줄을 서고 있었다. 버스로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라고 하니 단지 몇 시간만을 달릴 것이다. 난 오히려 이 곳이 어떤 곳인지 궁금해 지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떤 곳이길래 사람들이 이토록 지레 겁을 먹는 것일까? 자포자기 하며 떠났던 내게는 다른 사람들처럼 더 이상 두려워할 이유도 없었다.


아무도 없는 산길을 혼자 걷다가 라베데라스 칼사다스(RABE de las CALZADAS)라는 작은 마을로 들어섰다. 사람이 전혀 살지 않는 유령의 도시 같은 이곳의 흙빛 건물들은 바람 하나 불지 않아 쌓인 먼지가 군락을 이루어 건물로 보이는 듯 했다. 그 먼지가 건물이 되고 입으로 불면 날아가 버릴듯한 침묵이 마을 한가운데 쌓여 있었고 내 물통은 이미 바닥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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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끝에 위치한 작은 광장 한가운데에 십자 모양으로 수도가 박혀있고 사방으로 물이 떨어지는 수돗가가 보인다. 깊게 물이 고여 있는 수도의 아랬쪽에서 씻을 수 도 있는 구조였지만 먹을 수 있는 물인지는 알 수 없었다. 광장을 한 바퀴 돌아봐도 물어볼 사람이 없다. 어떻게 이렇게도 아무도 보이지 않을 수 있을까? 수도 앞에는 메세타로 들어가는 오르막길이 입을 벌리고 있었고, 난 물 쪽으로 한발자국 다가가 그 속을 들여다 보며 고민에 빠졌다. 겉보기 만으로는 먹을 수 있을지 판단이 서지 않아 수돗가를 중심으로 천천히 한 바퀴를 다시 돌다가 물속에서 작은 움직임을 발견하고 멈춰 섰다. 1미터는 족히 넘어 보이는 깊이여서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뭔가가 움직였다. 난 미간을 찌푸리며 물 가까이 얼굴을 갖다 댔다. 잠시 후 물 속 바닥에서 천천히 움직이는 가재 한 마리가 보인다. 인공적으로 만들어놓은 곳이라 가재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보니 내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실없이 웃음이 나왔다. 의심할 여지 없이 물을 받아 오르막을 오르기 시작했다.






메세타 지역 중 까미노 프랑스 길이 걸치는 부분은 해발 950미터에 20킬로미터가 넘게 넓게 뻗어있는 평원 지역이다. 해발이 높다 보니 아침, 저녁은 유난히 춥고 낮은 뜨겁다. 이곳은 기온의 연교차가 크고 건조하여 나무나 목초지가 생기지 못하므로 일단 이 곳에 들어서면 작은 나무그늘 조차 만날 수가 없다. 이런 지역의 특성으로 주변에는 온통 밀밭밖에 보이지 않는다. 건기인 요즘 같은 여름에는 강수량이 워낙 적어서 준 사막지역으로도 분류되는 곳이다. 워낙 악명 높은 지역이다 보니 이곳을 걷는 순례자들은 의례 이곳을 걸을 것인지 버스를 타고 이동할 것인지에 대해 처음부터 결정하고 시작하게 된다.


역시 명성에 걸맞게 햇빛은 뜨겁고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뙤약볕에 머릿속까지 익어버리는 느낌이다. 도망갈 곳도 없었다. 얼마 전 테스트해 본 고무줄 선글라스를 꺼내 안경에 붙여 썼다. 시야가 트이니 조금 나아지는 듯 하다. 계속 오르막을 오르며 쉴만한 곳을 찾았으나 정말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는다. 몇 킬로미터를 오르고 있으려니 귀에 거슬리는 소음이 들리기 시작한다. 슬슬 짜증이 나려는데 뒤에서 여행용 캐리어를 끌고 두 명이 떠들며 올라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난 잠시 길 옆으로 피해 앉아 사람들이 지나가고 난 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 무렵에서야 다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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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세타는 평온했다. 아주 가끔씩 느껴지지도 않을 만큼의 바람이 불었지만 주위 어느 곳을 둘러 봐도 고요했다. 새파란 하늘과 노란 밀밭이 아름답고 평온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 평온함을 따라 차츰 마음도 안정되는 것이 느껴진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이 흩어져 있던 마음을 천천히 제자리로 돌려놓고 있다. 가만 느껴보면 그것은 따뜻함이다. 거의 느껴지지 않을 세기로 주위를 감싸는 바람처럼 내 마음을 움직이고 있는 그것은 따뜻하고 평온하다. 머릿속이 참기 힘들 정도로 익어가는 것 같았지만 그 사막과 같은 길은 분명히 공격적이지 않았고, 긍정적인 의미를 전달했다.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쌓여가는 먼지와 같이 내가 미쳐 알아차리기 전에 분명 어떤 의미들을 한겹 한겹 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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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아래쪽으로 푹 파여있는 지역에서 작은 마을이 나타났다. 집은 몇 채 없었지만 그곳이 오늘 쉬어 갈 목적지였다. 숙소에 들어간 잠시 후 팻 일행이 나타났다. 그들도 이곳에서 묵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