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체력의 한계에 도전하다 - 2

Bayonne ~ ST. JEAN PIED DE PORT, 1st Day

by 이작

첫째 날.


생장피에드포트의 첫인상은 자그마한 시골 마을로, 지팡이를 짚고 큰 배낭을 멘 순례자들과 가벼운 옷차림으로 어린이들의 손을 잡고 놀러 온 관광객들이 뒤섞여 있는 곳이었다.


순례자 사무실의 위치를 미리 확인하지 않은 탓에 무작정 사람들이 많이 가는 곳으로 따라갔다. 작은 마을인데도 시내까지의 진입로가 꽤나 멀었다. 작은 상점이나 기념품 점이 있어야 할 진입로의 양쪽으로 가정집들만 죽 늘어서 있었고 그 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니 그제야 기념품 상점이 하나하나 나타났다. 순례자 사무실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순례를 시작하기 전 먼저 순례자 사무실에 들러 등록을 하고 그곳을 들렀다는 증명으로 찍어주는 도장인 세요(Sello)를 받아야 한다. 순례자라는 의미의 “페레그리노”로 지칭되는 시작점이 그곳이었고, 걷다가 혹시 잘못되더라도 그곳에서부터 흔적을 추적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미 태양은 높이 올라와 있었고, 더 이상 늦춰지면 예약해 둔 알베르게(Albergue)의 도착 시간도 늦춰지게 되어 바로 옆의 기념품 점으로 들어갔다.


알베르게는 순례길에 마련되어 있는 숙소이다. 공립, 시립, 사설 등 길 주변으로 많은 알베르게가 갖춰져 있으며 오늘 가려고 하는 오리손 알베르게(Orisson albergue)는 내일 넘어야 하는 피레네 산맥의 시작점으로부터 출발하여 8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사설 알베르게다. 산맥을 넘는 코스를 끊어 쉬어가기 위해 많은 순례자들이 찾는 곳이었지만 당일에는 대부분 빈자리가 남아있지 않아 서울에서 출발 전 미리 예약까지 마쳐 두었었다. 여기가 서울에서 준비한 마지막이자 순례길의 시작 지점이었다.


길을 물으려고 들어간 기념품점에서 순례자의 상징인 가리비 조개와 30유로나 하는 가이드북을 구입하고 처음으로 세요를 받았다. 서울에서는 정보가 한정돼 있다 보니 현지에서 많이 찾는 가이드북을 직접 구입하려고 미리 구입하지 않았던 물품이다. 역시 기념품점에서는 영어가 유창한 직원이 이것저것 보여주며 설명에 여념이 없다. 난 항상 서양 사람들은 무슨 말이 이렇게 많을까 생각하곤 한다. 예전 캐나다 홈스테이에서 지낼 무렵 냉장고 고장으로 주인아주머니가 수리공을 부른 적이 있다. 그때도 수리시간은 30분이 채 걸리지 않았지만 2시간을 넘게 떠들고 가던 수리공을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당연하다는 듯 버스 안에서나, 처음 보는 사람들이나 모두 말하기를 즐겼었고 그렇지 못한 동양 사람들은 항상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난 수많은 설명들을 뒤로하고 가리비 하나와 안내책자만을 들고 순례자 사무실의 위치를 물어 바로 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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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 사무실은 그 명성에 비해 평범하고 소박한 나무문으로 돼 있었다. 한해 수십만 명이 다녀가는 곳 치고는 소박하고 깔끔하다. 안으로 들어가니 상담하는 사람이 여섯 명, 안내해 주는 사람이 한 명, 그리고 상담하는 사람 뒤에서 부지런히 물을 떠다 나르는 할머니 한 명이 전부였다. 가방을 내리고 차례를 기다리다 보니 상담석 한자리가 비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오라는 듯 손짓을 한다.

백발의 할아버지가 손을 내밀었다. 그곳에서 순례자 등록 후 몇 가지 당부사항과 안내를 들을 수 있었다. 개인정보 몇 가지를 적고 순례자 여권 및 안내문서 몇 가지를 받는 것으로 간단히 등록이 끝나며, 옆에 쌓여있는 가리비 조개 중 하나를 고르고 원하는 만큼의 기부금을 넣는 것으로 모든 절차가 끝이 났다. 백발의 상담자가 모든 절차를 마친 후 언제 출발하냐고 묻는다. 이곳에서 오늘 묵을 알베르게를 배정해 준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한 번에 산맥을 넘는 일정을 소화하기가 두려웠다. 그 두려움을 조금이라도 무마시키려 조금이라도 산 위로 올라가 있는 오리손 알베르게를 예약해 뒀었다. 난 바로 출발하겠다고 했다. 시계를 보니 1시, 오늘도 속이 좋지 않아 더 이상은 뭔가를 입에 넣고 싶지도 않았고, 단순히 마을을 빠져나가기 전 주변에서 과자라도 하나 사 먹고 가려고 가볍게 생각하고 있었다. 백발의 안내자는 힘들게 자리에서 일어나 몸조심하고 좋은 여행이 되라며 다시 악수를 청한다. 그리고 순례자들의 인사를 처음으로 건넨다.



부엔 까미노(Buen Camino)!



가슴이 뭉클하고 이상하다. 살짝 눈물이 도는 것도 같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몇 개월간 준비한 이 여정을 시작하게 된 기쁨일지, 아니면 고생길에 대한 예감일지, 수만 명이 스쳐 지나가지만 그 한 명 한 명에게 전달하려고 하는 저 백발 상담자의 진심을 느낀 것인지 나 자신의 감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단지 마치 꼭대기에 이미 올라가 본 사람이 괜찮다고, 힘들어도 이곳까지 오는 길은 가볼 만하다고 눈으로, 마음으로, 굳이 언어라는 1차원적인 수단을 통하지 않고서도 전달되는 무엇인가가 가슴으로 흘러 들어온 느낌이다. 그것과 함께 이제는 혼자인 거라는,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몇 주를 홀로 버텨야 한다는 막막함도 함께 전달 됐다.



이 복잡한 감정은 뭐지?



짧은 시간에 이렇게 많은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어릴 때 파리를 잡다가 문득 생각했었다. “파리는 왜 이렇게 빠를까?”에서 시작한 물음은 “사람이 팔을 휘젓는 그 짧은 시간에 파리는 어떻게 그것을 감지하고 다른 방향을 찾아내 방향을 바꾸어 날아갈까?”로 바뀌었었다. 어린 마음에 혼자 내린 결론은 그 짧은 시간을 이용해 인지하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을 보면 곤충들이 느끼는 시간의 개념이 사람과는 많이 다를 것 같다는 것이었다. 하찮게 보이는 파리들이 같은 시간을 기준으로 사람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생각을 할 수도 있다는 느낌이었다. 하찮은 파리에게 질 수 없어서 짧은 시간에 그만큼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지금이 바로 그것이 실현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생각이 아니었고 단순한 전달도 아니었다. 손을 잡고 눈빛을 교환하는 것 만으로 언어라는 도구로는 너무도 투박하고 거칠어서 표현할 수 없는 부분까지 한꺼번에 전달받은 느낌이었다. 역시 사람은 파리보다는 나은 존재였나 보다. 순례를 완주했던 분들이 협회에 신청을 하고 일정기간 교육을 이수하면 이런 곳에서 자원봉사가 가능하다고 하니 저 백발의 상담자와 그 뒤로 주전자를 들고 물을 준비하는 할머니도 모두 이 길을 먼저 걸었던 사람들일 것이다.






사무실을 나와 10분쯤 걸으니 어느새 마을의 끝자락이다. 그늘에서 잠시 가방을 내리고 스틱을 꺼냈다. 평생 처음 써보는 도구였다. 주위에 등산복을 입은 사람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고 유명 브랜드의 가방을 메고 있는 사람들조차 많지 않았다. 난 여기에 무엇을 하러 왔는지, 요점을 놓친 느낌이다.


사회의 부속이 되면서 나름 그에 맞는 소비를 강요받아왔다. 등산을 하려면 등산복을 꼭 입어야 했고, 운동을 하려면 꼭 운동복을 입어야 했다. 뒷산에 올라도, 집 앞 개천가를 걸어도 턱없이 비싼 등산복을 입은 사람들이 즐비했다. 파리에서 취한 걸인이 들고 다니던 포도주를 한국에서는 멋진 옷을 입고 멋진 분위기에서 따르는 방법을 배우고 종류를 배워 아는 척을 하며 마셔야 했다. 어느 곳에서도 제일 싸게 만들 수 있는 음식인 스파게티는 우리나라에 들어오며 어느덧 고급 음식으로 바뀌어 있었다. 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나에게 이해되지 않은 부분들이 많이 있겠지만 이건 뭔가 이상하다. 토끼는 바로 앞에 있는데, 주변의 돌멩이로도 잡을 수 있는 거리인데 하늘을 보고 꼭 좋은 화살로 쏴야 멋진 토끼에 정확히 맞을 것이라고 우기는 것 같다. 그 화살과 장비들은 가족들까지도 잊어가며 내 시간, 노력과 맞바꿔 벌어들인 것들과 교환해야 한다는 것을 아무도 똑바로 보려 하지 않는다. 부끄러웠다. 내가 가진 모든 것과, 눈에 보이는 ‘나’라는 존재는 사실 아무 의미 없는 허영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떠나 나를 숨기고 싶었다.


가방을 뒤져 아버지의 유품인 장갑을 꺼냈다. 어머니가 직접 아버지를 위해 산 것이니 그다지 비싼 것은 아닐 것이다. 아버지가 한두 번 낚시 갈 때 사용했었고 몸이 좋아지면 다시 끼겠노라고 고이 모셔둔 것이었다. 아버지의 유품에서는 10년 가까이 된 새 지갑이 나왔다. 약 10년 전 독일 출장 때 백화점에서 약간의 흠집이 있다고 조금 싸게 나왔던 것을 구입해 선물로 드렸던 것이었는데, 유품을 정리하면서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고 아껴둔 깨끗한 그 지갑을 볼 수 있었다. 지갑 안에 끼워있던 브랜드 홍보물조차 그대로였다. 그런 분이 사용하던 장갑이니 그 가격이야 오죽하랴. 장갑은 편안했다. 잘 맞는 느낌이었다. 낚시용 장갑이었지만 얇고, 스틱이 딱 손에 붙는 느낌이다. 얼굴이 붉어졌다. 아무도 없는 밝은 무대 위에 발가벗겨져 혼자 서있는 것 같았고, 심한 야유가 들려왔다. 나 자신이 싫었다. 마을 길의 포장이 끝나는 곳에서 부끄러움을 되새기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적어도 이 길에서만큼은 더 이상 부끄럽지 않도록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마치 내가 이곳에 온 목적인 것처럼, 마치 누군가 믿음직한 목소리로 옆에서 그렇게 하라고 이야기해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야 혹시 마지막에 얻는 것이 없을 경우에도 그 시간은 쓸모없는 시간이었다고 자신 있게 푸념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최대한 남을 돕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있으면 직접, 기쁜 마음으로 하고, 검소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마지막처럼 최선을 다해 보내자고 결심했다. 지금은 운동이나 관광을 목적으로 이 길을 걷는 사람도 많다고 하지만, 이 길은 원래 성경에서 예수의 제자 중 하나인 야고보의 무덤을 찾아 죄 사함을 목적으로 걷던 길이었다고 한다. 야고보의 무덤이 발견된 곳에 커다란 성당을 세우고, 각 지역에서 자기 죄의 사함을 받기 위해 그 무덤을 찾아가는 길이었다고 한다. 옛날 사람들은 실제로 이 길을 걸으면 자신의 죄가 사해진다고 믿었었고, 그로 인해 금전적인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사람을 사서라도 대신 걷도록 했던 길이었다. 난 그렇게 이 길을 견디고 산티아고에 도착하면 가까운 포르투갈이나 이탈리아 등 주변 유럽국가를 들러 고단한 마음도 풀어보고 크레덴셜이라고 부르는 순례자 여권뿐 아니라 실제 여권에도 도장을 찍어가며 견문을 넓혀 보자는 계획도 세웠다.


산길이라고는 하나 오늘 걸어야 할 거리는 단지 8킬로미터뿐이다. 그 후에 이 길에서 처음 만나는 숙소가 있을 것이고, 처음 보는 사람들과의 만남이 있을 것이다. 은근히 기대가 된다. 하지만 한국사람들 만은 만나고 싶지 않다. 난 장갑을 꺼내 양손에 힘주어 끼우고, 모자를 고쳐 쓴 후 오르막으로의 첫발을 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