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까미노 길의 최적기, 여름

TRIACASTELA ~ SARRIA, 30th Day

by 이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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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커다란 조개가 있는 약수터를 지나 산길을 구불구불 걸어서 제법 큰 도시인 사리아에 도착 했다. 내가 찾아갈 사리아 숙소는 신시가지를 지나 높은 언덕을 오르면 나타나는 성당에서 시작되는 구시가지에 위치하고 있었다.

작년 5월 팻이 아들과 함께 걷기 시작했던 길이어서 첫 번째 여행에서의 경험담을 들려준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비가 오던 꿉꿉한 날씨와, 매일 숙소에 들어가자 마자 물로 가득 차있던 신발을 벗어 널어 놓지만 그 다음날도 어김없이 다시 젖은 신발과 옷들을 고스란히 입어야 했던 이야기들이었다.

5월 이었지만 대부분의 추억들은 비에 관련된 것들이었다. 건기인 지금이 사람이 좀 많고 덥긴 하지만 다른 시기에 비해 더 좋을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이곳으로 출발하기 전 읽었던 대부분의 안내 책자나 블로그에서는 한여름에는 수많은 방문자들과 뜨거운 햇빛 때문에 걷기 좋은 봄이나 가을을 추천한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해 보면 한 여름의 까미노는 훨씬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고, 날씨도 춥지 않아 순례자에게 가장 큰 고민거리인 짐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는 계절이며, 갖가지 여름 과일들을 어디서나 맛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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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사리아로 오는 길에 산골 농가에서 커다란 그릇에 노란 자두 같은 과일들을 잔뜩 내놓은 곳을 지났다. 시원한 물에 담가 두고 무료로 먹고 싶은 만큼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해 놓은 곳이었다. 또한 순례자들을 위해 길목에 작은 플라스틱 그릇에 과일들을 포장해서 가져가기 좋도록 놓아 둔 곳들도 있었다. 수많은 이름 모를 과실수들이 길옆에 열매를 달고 있어서 흔하게 따먹을 수도 있다.

뜨거운 햇빛은 아침 일찍 길을 나서면 웬만큼은 피할 수도 있으니 이 길을 걷기 위한 최고의 시기는 여름일 것이다. 또한 햇빛 아래를 걸으며 느껴왔던 고통보다는 기쁨이 더 컸던 만큼, 한여름의 까미노가 순례 길로서는 최적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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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시가지에 도착 후 신시가지가 비록 넓고 볼만한 것이 많아 보이기는 했어도 다시 돌아오려면 높은 언덕을 다시 올라와야 해서 구경은 접기로 한다. 다시 올라올 힘이 남아있지도 않았지만, 이제는 도시 냄새 나는 세련된 장소에서는 불안함까지 느껴진다.

숙소를 잡고 구시가지 구경을 나서려고 준비하는 동안 일행들은 각자의 침대에서 스페인 사람처럼 시에스타를 즐겼다. 난 혼자 조용히 1층으로 내려와 늦은 점심으로 순례자 메뉴를 주문했다. 식당 한쪽을 벽으로 막고 음식이 나오는 작은 구멍을 통해 보이는 불쇼가 인상적이다. 주인 혼자서 주문도 받고 간간이 중국 음식점처럼 커다란 프라이팬에 불을 만들며 직접 음식을 조리한다.

기다리는 동안 태수 씨가 들어오며 인사를 한다. 요 며칠 보지 못한 사이에 팔이 없는 티셔츠 밖으로 드러난 검은 살이 부쩍 까맣게 그을려 있었다. 매일 빵만 먹다가 영양 보충으로 순례자 메뉴를 먹으려고 식당을 찾는 중이라고 한다.

그도 역시 양쪽 팔의 손가락부터 어깨 뒤까지 온통 배드벅에 물려 있었다. 이 지경인데도 아직 약국이나 병원은 가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 긍정적인 사람은 팔을 긁을 때마다 희열을 느낀다며 크게 웃는다. 난 식사를 마치고는 어제 구입했던 먹는 약과 바르는 약을 가져 와 건넸다. 저 양쪽 팔이 모두 흉터가 된다고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혹시나 귀국 시 정체 모를 전염병으로 오해 받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저녁 식사 후 바르는 약은 다시 돌려 받았지만, 약 없이 저 고통을 견뎌낼 생각을 하니 불쌍하기까지 했다.





오늘은 이탈리아 사람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다른 무리들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 누군가가 식당 밖 게시판에 한국어로 '후식은 초코케이크가 제일 맛있다'고 적어놓은 것을 보고 초코케이크를 주문했는데, 흔히 알고 있는 케이크는 아니었고 견과류가 들어있는 녹인 쵸코릿을 납작한 모양으로 굳혀놓은 것이 제공 됐다. 견과류의 고소한 맛이 짙은 초코와 합쳐져 쌉싸래한 기분좋은 단맛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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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대화를 나누며 서로 다른 음식을 시켜 나눠 먹기도 했다. 팻 일행이 몇 번 만났다고 하는 또 다른 영국인 새라와 독일인 앙카등 단지 한 두 번 봤던 사람들인데 어느새 한 식구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얼마 남지 않은 일정이 아쉬우면서 슬프기까지 하다.

난 지금 하루 하루를 신들의 세계에서 빠른 속도로 치유 받으며 살고 있음을 느낀다. 건강해진 마음에 건강해진 몸이 더해지고 있으며, 상처에 한꺼풀씩 씌워지던 무엇인가가 상처를 모두 흡수하고 하나씩 떨어져 나가고 있다. 길을 걷다가 성당을 만나면 들어가 기도를 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세요를 받는다. 매일매일 아주 작은 일이라도 기적임을 경험한다. 이렇게 매일 치유 받으며, 기적을 느끼며 사는 이 느낌과 나의 솔직한 모습이 좋다. 평생 느껴보지 못했던 이 행복함, 온몸으로 나타나는 치유의 건강함.

이 환경을 떠나야 하는 것이 문득 두렵다. 이 길이 끝나면 다시 서울로, 그 생활로 돌아가 적응해 살 수 있을지 아직은 자신이 없다. 그 사회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십 년을 넘게 적응하려 발버둥 쳤는데, 멀리 떨어져 나온 이곳에서의 적응은 단지 한 달이 걸렸을 뿐이다.

두려움은 이곳이 아니라 내가 십수년간 있었던 그곳에 있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일상의 환경 그 자체가 두려움이었다. 다시 예전처럼 사회의 톱니로 물려 돌아갈 수 있을지, 그 환경을 버틸 수 있을지 아직 내 마음은 대답하지 못한다. 아직도 마음속에 남아있는 두려움은 이것 하나인듯 싶다. 내가 다시 예전의 나로 돌아갈 수 있을 지, 다시 살아갈 수 있을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