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EBREIRO. ~ TRIACASTELA, 29th Day
조금 게을러지기로 한 오늘 하루는 다른 날보다 훨씬 늦게 시작 됐다. 아침 8시에 길을 나서도록 모든 일정을 맞추고 동화 마을 펜션에서 포근하고 아늑한 침대에 눕다 보니, 일행 모두가 다른 날보다 늦게 일어나게 됐고 식사를 천천히 마치고도 맑은 날씨의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 산이 너무 높고 산길이 벼랑의 바로 옆으로 이어지다 보니, 해가 뜨기 전에 출발하면 추락의 위험도 있었다.
열린 창문으로 보이는 아침의 풍경은 마치 창틀에 고해상도의 그림을 끼워놓은 것 같다. 어제 한치 앞을 알아 볼 수 없도록 마을을 뒤덮고 있던 구름은 온데간데 없다. 이렇게 멋진 풍경을 보지 못하고 새벽 일찍 출발했다면 반드시 후회했을 것도 같다. 모든 것은 선택이지만 지금의 선택은 내 행복의 기준으로는 조금 더 옳았던 것 같다.
우리는 항상 삶에서 하나를 얻으면 다른 하나를 잃는 제로섬게임을 한다. 오늘 이 경치를 얻기 위해 더 좋았을 수도 있는 새벽을 잃었지만 후회는 없다. 느긋하게 주변의 바를 찾아 따듯한 코코아와 빵을 주문해 본다. 그리고 이곳에서 마치 여행자처럼 바깥 풍경을 즐기며 아침을 먹었다.
창문 밖의 낮은 빠요사의 지붕은 우리나라의 초가집을 연상 시켜 친근한 느낌마저 들었다.
고도가 높은 지역이다 보니 여전히 날씨가 쌀쌀하여 두꺼운 옷을 챙겨 입고 출발했다. 철십자가 이후로 다리에 힘이 붙어 항상 앞서 걸었던 팻을 따라잡을 수 있게 됐고, 이는 마음이 치유 됨과 동시에 몸도 치유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병은 마음에서 온다고 하더니 역시 마음이 몸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맞았다. 허리 통증도 없어지고, 함께 출발해도 항상 가장 늦게 도착했었는데, 이젠 오히려 다른 일행들의 보폭에 맞춰 줘야 할 정도로 눈에 띄게 회복되고 있었다. 육체는 마음에 속한 것이라는 단순하고 확고한 증명이었다.
높은 산을 내려오며 작은 마을을 몇 군데 지났다. 한우와 똑같이 생긴 소를 보고 깜짝 놀라기도 하며, 작은 집조차 몇 채 없는 마을의 돌로 지어놓은 작은 성당에서 기념 사진도 찍었다. 아무리 작은 마을이라도 성당은 하나씩 있었고, 대부분 촛불이 켜져 있었다. 각 성당을 관리하는 사람들도 가끔씩은 볼 수 있었다. 스페인 시골마을에서 사람을 보기는 어려웠지만 성당들은 계속 관리가 되고 있는 것 같았다. 특이한 것은, 시골 성당이라고 해도 모두 일관적인, 단순하고 틀에박힌 모습이 아니라 각각 개성 있게 설계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이 곳의 성당은 가정집 거실정도의 무척 작은 규모였지만, 모든 시설들이 그 작은 공간안에 있었고, 아담하고 아늑한 느낌마저 들었다. 더군다나 구조물 전체가 돌로 지어져 무척 튼튼해 보인다. 감탄하며 성당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중국에서 살고 있는 누님에게서 전화가 온다. 어머니 생신인데, 중국에 가 계신 어머니께 전화 한 통 하지 않는다고 투덜거린다. 시간이 뒤틀린 이곳에서 내 생각에 치우쳐 살다 보니, 시간가는 것도 모르고 여기까지 왔던 것이다.
사실 난 지금이 며칠인지, 얼마나 걸었는지, 심지어는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조차 몰랐다. 이곳의 여행은 마치 시간을 잃어버린 신들의 세계로의 여행과도 같았다.
평소보다 두 시간 이상 늦게 출발하다 보니, 목적지에 늦게 도착 하게 되어 침대가 남아있는 알베르게를 찾을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오늘도 2인 30유로짜리 팬션을 잡았고, 내일부터는 아침 일찍 출발하기로 한다. 짐을 풀고 정리를 마치고 나니 문득 양쪽 팔이 무척이나 가렵다. 베드벅에 물린 곳이 점점 부어 오르며 이 후 며칠 동안 가라앉지 않고 더욱 넓어졌다. 여러 곳을 물리니 양쪽 팔이 벌겋고 모두가 처음부터 내 근육이었던 것처럼 울퉁불퉁 했다.
처음 물렸던 곳은 하얗게 후유증이 남아 이젠 슬슬 겁이 났다. 하는 수 없이 주변 약국을 찾았다. 가렵다는 말도 필요 없이 물린곳을 보여주니 바로 먹는 약과 함께 바르는 연고를 내준다. 약값이 약 13유로 정도로 한국에 비해 많이 비싸다고 느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국립 병원을 찾아가면 공짜로 치료를 받을 수도 있다고 한다.
오늘 구입한 약은 정말 효과가 좋았다. 복용하고 조금 기다리니 가려움이 사라졌고 이틀동안 연고를 바르니 씻은 듯이 부기가 가라앉아버렸다. 그 이전에 물렸던 곳은 흉터가 남고 가끔씩 두드러기도 생겼는데, 약으로 치료한 부분은 재발도 하지 않았다. 역시 현지에서 얻은 것은 현지의 약이 최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날 밤 팬션에서도 역시 베드벅에게 추가로 팔의 빈 자리를 내주어, 혹시 짐이나 몸에 붙어서 따라다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갈 때 본의 아니게 한국으로 함께 가져가게 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에 산티아고에 도착하면 적당한 곳을 찾아 모두 정리 해야 할 숙제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