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긴 다리를 건넌 사람만이 포르투마린에 오른다

SARRIA ~ PORTOMARIN, 31th Day

by 이작



사리아에서 내려오는 길에는 걷는 사람들이 셀 수도 없이 많아졌다. 아무도 없는 길을 혼자 걷는 일은 아예 없다. 많은 사람들이 예전과 다르게 가볍게 인사하고 스쳐 지나간다. 사리아부터 산티아고까지는 약 115킬로미터의 거리로, 여기에서 시작해도 충분히 인증서를 받을 수 있으므로 단기여행의 시작점이 되는 경우가 많다.

중, 고등학생 또래의 학생들이 옷을 단체로 맞춰 입고 걷는 것도 흔하게 볼 수 있으며, 유럽의 경우 이 인증서로 일부 대학에서는 학점 인정까지 가능하다고 하니 방학을 맞아 부쩍 사람이 많아진 것이다. 심지어는 가방도 없고 지팡이도 없는 사람들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뛰듯 걸어가는 사람들도 있고, 음악을 들으며 힘 자랑 하듯이 걷는 사람들도 있다.

프랑스에서 시작한 사람들은 이제는 발에 물집도 거의 없어졌고 온몸에 힘이 솟아 시간이 갈수록 흥겹게 걸을 수 있지만, 이곳에서 시작한 사람들은 그와는 반대로 시간이 지날수록 속도가 느려지며 오후가 되니 벌써 절뚝거리는 사람들도 등장했다. 처음에 우리가 겪었던 온 몸의 근육통, 발바닥의 물집들을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이지만, 이제부터 마지막 날까지 어쩌면 우리보다 더 심하게 겪을 수도 있을 것 같다.




포르투마린.jpg

마지막 목적지인 포트투마린에 도착했다. 깊은 골짜기를 지나야 마을에 진입할 수 있는데, 지금 서있는 이곳부터 반대쪽 산중턱까지 하나의 높고 긴 다리로 이어져 있었다. 아찔할 정도의 높이에 건설된 다리였지만 건기라 그런지 좁아진 강과 넓고 평평한 잔디밭을 내려다 볼 수 있었다.

다리를 건너고 다시 높은 계단을 올라야 비로소 마을로 진입하는 문에 다다랐다. 내려다 볼수록 아찔한 이 길고 높은 다리를 건너는 데만 20분이 넘게 소요되었다. 아래를 내려다 보면 아득한 바닥이 보인다. 직선으로 연결돼 있는 이 다리는 눈앞에 마을이 있는 것처럼 빤히 보이는데도 마치 러닝머신 위에서 제자리 걸음을 하고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길고 긴 다리를 건너자 이번에는 높은 돌계단이 버티고 있다. 마치 이곳을 지나기 위한 의식처럼 계단 아래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돌계단을 하나하나 걸어 올라간다. 가파른 높은 계단은 마치 뒤에서 배낭이 잡아 당기는 것처럼 느껴졌다. 난 뒤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인사를 하듯 몸을 바짝 앞으로 숙였다. 손이 바닥에 닿는다. 네발로 걷듯이 계단 끝까지 오르자 나무 문이 있었고 그 문을 들어서면 바로 마을의 시작이었다. 마을 입구의 오른쪽으로 수영장도 보이고 산을 깎아 만든 곳임을 증명하듯 마을 내의 골목 길들은 어디나 경사져 있었다.

우린 자연스럽게 가장 먼저 만난 알베르게에서 묵기로 했고, 숙소의 안쪽도 넓고 깨끗해서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다. 게다가 주방이 있어서 간단한 요리도 가능했다. 난 약간의 몸살기를 다스리기 위해 인스턴트 수프를 사서 따뜻하게 조리했다. 물을 너무 많이 부어서 묽은 죽이 돼 버렸으나 가지고 다니는 바게트 빵과 함께 먹는데는 지장이 없었다. 간단히 저녁을 해결하고 침대로 돌아가는데, 팻이 해줄 말을 찾았다고 하며 흥분된 모습으로 불러댔다. 팻은 그 길다랗고 굵은 검지손가락을 앞뒤로 흔들며 안내책자의 문구를 읽어내려갔다.




“The foolish man seeks happiness in the distance; the wise man grows it under his feet.”
“어리석은 자는 멀리서 행복을 찾지만, 현명한 자는 가까운 곳의 행복을 키운다.”

- J R Oppenheimer




나도 그와 같은 책을 보고 있으니 당연히 못 봤을 리 없는 이 문장이 몇 주 동안 함께 걱정하고, 힘들때마다 함께해 준 팻의 입을 통해서 귀로 흘러 들어오는 순간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 진다. 팻의 입에서 나온 말 한마디가 투명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와 만나 내 귀로 들어오기 전까지 수십톤의 에너지를 얻어 나의 머리와 가슴을 후려쳤다. 순간적으로 가족들의 얼굴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난 망치로 한대 맞은 듯 한참 동안을 멍하니 서있었다. 정신이 멍해지며, 마치 눈앞에 막고 있던 벽이 허물어지고 그 건너편의 생전 처음 보는 세상을 보게 된 느낌이었다. 그것을 통해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제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삶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이 가장 소중한 것인지 그 실마리가 보이고 있었다.

정신을 차린 후에 난 제일 먼저 여행사에 전화를 걸어 까미노길 이후 모든 계획을 취소하며 귀국용 비행기 표를 앞당겨 달라고 했다. 팻은 나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내 여행에 대해 듣고 고민하다가 오늘에서야 비로소 해 줄 말을 발견하고 저렇게 해맑게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비버를 닮은 커다란 앞니가 그와 함께 자비롭게 웃고 있는 듯하다. 단지 아버지와 동갑이라서 이런 느낌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매일 친아들처럼 챙기고, 컨디션을 확인하고, 철십자가에서는 아무 말없이 잘 할 수 있도록 도와 주었었던, 이길 어느곳에서든 항상 곁에서 친구처럼 있었던 그런 사람을 통해 전해 들으니, 그 말이 더욱 커다란 의미가 되고 있었다. 마치 이 한 구절을 내게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여행 내내 일부러 계속 만나왔고, 가장 효과적인 시간에 이 구절을 발견하도록 계획되고, 가장 적절한 시간에 전달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철 십자가에서 마음의 짐을 내려 놓고도 내게 남아있었던, 여행 내내 마음 한구석의 가시와 같던 그것이 가족에 대한 사랑이었음을, 가족의 소중함이었음을 그의 입을 통해 새삼 깨닫게 된 너무 멀리 돌아온 하나의 확신 이었다.



“사랑이란게 아픔과 같은 말이었구나, 양날의 검이었구나.”



까미노를 마친 후 계획했었던 다른 유럽 국가로의 여행은 가족들이 없이는 나에게 아무 의미가 없는 사치이며 또 다른 허영이었음을 알게 되었고 마음속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던 상처가 벗겨지는 순간이었다.






오늘 포르투마린의 긴 다리를 건넜다. 햇빛을 받으며 긴 다리를 터벅터벅 건너왔고 다시 높은 계단을 올랐다. 그 이후에야 수영장이 보이는 마을에 들어설 수 있었고 우리의 숙소를 찾아 편히 쉴 수 있었다. 처음에 이 길에서 아무런 의미를 느끼지 못하던 나같은 사람도 까미노의 긴 여행에서 단순하고 반복적인 고난의 과정을 직접 겪은 후에야 비로소 평화와 기쁨, 그리고 정확한 깨달음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오늘 이 길이 함축적으로 대변해 주고 있었다. 가슴이 뛴다. 이런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에 대해 다시 한번 놀랍고 감사했다.

세상은 항상 내가 생각하고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 성공이나 실패, 이런 것들도 항상 나의 의지와는 별개였다.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방향을 설정하고 이루려고 노력하지만 자신의 행동이나 생각, 본인의 의지등은 궁극적으로 삶에서 그 개인을 정의하는 것에 대해서는 커다란 의미를 갖고있지 않는것 같다. 내 삶에서 자기 자신이 주체가 되어 이뤄 왔다고 생각한 것들은 보기 좋게 오류로 판명 되었고, 그때마다 난 발가벗겨지고 있었다. 삶은 나의 것이 아니었다. 어떤 목적을 위해, 나의 삶이 우연이라 부르는 어떤 작은 것들에 의해서 주변 사람, 돌, 건물, 자연등의 의미없는 듯한 작은 움직임들에 의해 영향을 받으며, 산들바람 같은 작은 기적들에 의해서 가볍고 부드러운 흐름으로 천천히 한곳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본인의 생각을 모두 포기하고 내려놓지 않으면 절대로 알 수 없는 기적들로 이루어진, 결국 개인의 삶이란 그런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