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신들의 세계로의 여행 - 2

ST. JEAN PIED DE PORT~RONCESVALLES, 2nd

by 이작


안갯속에서 여섯 시간을 넘게 허우적거리자 햇빛이 높은 침엽수의 숲을 일직선으로 뚫고 들어와 간간이 땅에 까지 닿는 것이 보였고, 곧 안개가 전혀 없는 공간이 나타났다. 카메라 조리개의 초점이 맞춰지듯 갑자기 상쾌하게 선명해졌다.


안개 밖에서 돌아보니 긴 시간 갇혀있던 두꺼운 안개의 길은 피레네 산맥을 넘어가는 구름이었다. 마치 무게가 없는 흰색의 물이 산을 가볍게 따라 넘어가는 듯한 장엄한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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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몸은 축축한 땀과 습기로 젖어있지만, 그 커다란 산은 시끄러웠던 배경음악이 갑자기 꺼진 것 같은 정적으로 내게 들어왔다. 구름이 서서히 차오르며 푸른 산등성이를 넘고 산의 정적을 깨지 않으려는 듯 슬며시 땅을 타고 흐른다. 작은 소리로도 평화로운 구름을 깨워 파동을 일으킬 것 같아 멍하게 지켜보는 동안 조금 앞선 아래쪽에서 키 크고 깡마른 백발의 노인이 보인다. 그 장엄함을 작은 똑딱이 카메라로 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보이지 않았고 사진을 몇 장 찍더니 마치 급한 일이 있는 사람처럼 바로 길을 떠나 버렸다.






산을 넘어오는 길에 안갯속에서 음료수를 파는 트럭을 만났다. 두세 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음료수를 사는 것과는 상관없이 세요를 받을 수 있었다. 그 지점이 스페인의 국경 부근이라고 하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국적을 커다란 칠판에 표시했다. 가방을 내리고 두드러져 보이던 ‘S.KOREA’에 한 명을 추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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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에서의 첫 마을 론세스바예스에서 오래전 요새로 사용하던 건물을 개조한 시립 알베르게로 들어섰다. 밖에서 봐도 규모가 크고 오래된 건물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들어서기 전에는 건물 내부에 이끼긴 돌들이 흔하게 깔려있고 아직도 횃불을 사용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밖에서 보는 것과는 다르게 현대적인 리셉션으로부터 와이파이가 지원되는 1층과, 세탁기, 건조기, 각종 자판기까지 구비돼 있는 지하층, 견고한 2층 침대로 쾌적하게 지낼 수 있는 2층의 숙박시설까지 모든 시설이 완벽하고 깔끔하게 구성돼 있었다. 바닥이나 벽도 새로 단장한 듯 깔끔하고 깨끗하다. 2층을 침대방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1층부터 스틱과 신발의 휴대가 제한되어 먼지 하나 보이지 않는 깨끗한 침대를 사용할 수 있었다.


입구 휴게실에는 무거운 배낭의 무게 때문에 버리고 간 물품들을 필요한 사람이 가져갈 수 있도록 전시해 둔 장소도 보인다. 그 넓은 책상 위에 꽤 여러 가지가 놓여 있다. 정말 쓸모없어 보이는 이름 모를 물건들로부터 비누나 옷가지 같은 생활용품까지 하루를 걷고 난 후 본격적으로 짐을 줄이기 시작한 흔적들이 고스란히 보였다. 난 당장이라도 배낭 속 전자기기와 부속들을 꺼내놓고 싶은 심정이었다. 노트북과 충전기, 배터리, 카메라 등이 꽤 무게를 차지했고 이미 가방은 목표치를 지나 음식과 물을 합하면 18킬로그램도 훌쩍 넘겨 버렸다. 난 마음을 다잡고 새로 정리해보기로 했지만 정리를 마치고 보니 결국 모든 것이 다시 배낭 안으로 들어가 있었다. 단 한 가지도 버릴 수 없었다. 세상의 짐, 내가 의지하는 것들을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많이 갖고 있었지만 무엇 하나 필요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결국 짐을 줄이는 것은 포기하고 아직 젖어있는 빨래를 다시 해보기로 한다.


현대적인 시설이니만큼 무료 사용이 가능한 세탁기가 구비돼 있지만 결심했던 대로 내 손으로 직접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되어 직접 해 보기로 했다. 시설 내 빨래방에도 도우미(오스피탈레로)가 배치되어 스페인어로 쓰여있는 세탁기의 사용법부터 건조기 사용법, 수동 건조기의 동작까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도움을 받을 수 있었지만 왠지 내가 사용할 것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빨래를 마치고 나니 먹거리가 걱정이다. 바로 앞 식당에서 식사 전 예약이 필수라고 한다. 마침 1층 정문 바로 앞에 식당 문이 마주하고 있어서 처음으로 순례자 메뉴를 예약하고 돌아왔다. 이 길의 어디서나 싼값으로 순례자 메뉴라는 정식이 제공되는데 그 가격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싸고 훌륭한 식사로 구성되며 첫 번째 식사, 두 번째 식사, 디저트 및 포도주로 이루어진다. 또한 그 양이 남자 어른이 먹기에 충분하다고 하니 더 이상 음식을 걱정할 일은 없을 것 같다. 한 끼에 10유로 안팎의 가격으로, 일반식당에서는 최소 20유로를 줘야 간단한 식사만을 할 수 있는 것에 비해 무척 저렴하고 알찬 식사다. 메뉴는 돼지고기와 생선 중에서 선택할 수 있었다. 유럽 전역에서 많이 잡히는 생선이라고 하는데, 생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식성 탓에 돼지고기로 주문해 두었다.


돌아오는 길에 괜스레 건물 주변을 한 바퀴 돌았는데 이곳은 생각보다도 더욱 작은 마을이었다. 기다란 삼각형 모양의 마을에 숙소건물과 호텔 하나, 그리고 작은 집들 몇 채가 전부였다. 바닥에는 하얗고 눈부신 돌들이 깔려 있었고 걸을 때마다 서걱서걱 소리를 내며 슬리퍼 바닥의 작은 구멍들을 파고들었다.






짐을 정리하는 중 누군가 말을 걸어온다. ‘훌리오’라고 했다. 더스틴 호프만을 닮은 스페인 사람이었다. 다른 유럽지역에서는 혼자 있는 동양인 남자에게는 쇼핑몰이나 잡상인, 소매치기등을 제외하고는 미리 말을 걸어오거나 친절하게 다가오는 사람을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어서 괜히 경계를 하게 된다. 이것저것 이야기를 하다가 혹시 앞 식당에 예약했으면 함께 식사를 하러 가자고 한다.


어느새 저녁 시간이 되어 훌리오와 함께 식당으로 향했다. 넓고 기다란 식탁에서 모든 순례자들이 한꺼번에 앉아 가족처럼 음식을 먹는다. 무슨 할 말이 그렇게나 많은지 서로 처음 만나는 사람들인데도 시끌시끌하다. 모두 마치 일행처럼 즐겁게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난 어울릴 수 없었다. 부모님 세대에 비해서 많이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이런 자리가 마련되고 보니 영락없이 부끄럼 많고 체면 차리는 외톨이 동양인이다. 식사 후엔 훌리오가 함께 미사를 드리러 가자고 한다. 다른 곳과는 형식이 좀 다른 미사를 드리는 곳이라고 하며 앞장서서 안내했다. 일요일에 단 한번 교회에 출석 체크만 하던 나였지만 아무런 생각이나 저항도 하지 않고 그 결정을 따르기로 한다.


알아들을 수 없는 스페인어 미사이다 보니 시간 내내 성당 내부만을 훑어보며 자리를 지켰다. 신자가 아니라도 미사에 참석할 수 있었고 피곤했던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것 같았다.


겨우 이틀째인 이 길에서 난 도시와는 전혀 다른, 완벽히 다른 세상을 경험하고 있다. 지금 미사를 드리는 이 장소 역시 생소하다. 이 길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는 아직 짐작도 할 수 없었다. 한편으로는 너무 성급한 것 같기도 하다. 이제 겨우 이틀이 지났을 뿐이다. 하루가 일주일 같은 이틀이지만 그 이틀은 내 마음을 저 바닥까지 내려놓는 것에 온전히 소비되었다. 생각해 보면 마음을 내려놓는데 단 이틀밖에 걸리지 않다니, 기적에 가까운 속도였다. 이 마음에 무엇을 받아들이고 채워질지 알 수 없지만 아직 남아있는 한구석에는 사회의 톱니바퀴로 돌던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으려고 하는 두려움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 길에는 신의 흔적이 오롯이 남아 있다. 사람의 마음이나 건물이나 음식에서도 그 향기를 맡을 수 있다. 감동적인 자연 속에서 신을 만나고, 경외하던 사람들의 흔적과 만나고, 가끔씩은 그 시대로 돌아가 내가 그 흔적이 되는 경험이 가능했다.


훌리오가 옆구리를 툭툭 치며 속삭였다.



제기랄, 다른 곳 하고 똑같네. 그냥 나가자



숙소로 돌아와 각자의 침대로 돌아갔다. 양 발에는 새로 산지 두 달 밖에 되지 않은 등산화가 만들어 낸 여러 개의 물집과 이미 터져버린 동전만 한 살점이 보인다. 경련도 종종 일어난다. 하지만 이곳, 신의 세계에서는 생각만큼 아프지 않았다. 마음의 무게가 누르고 있어서였는지, 신발을 신고 있는 동안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음이 고통을 지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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