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책의 음악노트 (17) 대가의 중력장(重力場)

1부 예술은 장(場)에서 피어난다 — 하이든·클림트·듀크 엘링턴

by 푸른책

역사를 들여다보면,
문화가 꽃피우는 곳에는 언제나 장이 먼저 있었다.
사람들이 모이고, 감정이 움트고, 새로운 것이 태어나기 위한 공간.
장은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그곳을 지키는 한 사람의 태도와 품격에서 시작되는 보이지 않는 기류다.



하이든, 클림트, 듀크 엘링턴.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았지만,
이 세 사람은 공통적으로 시대가 머무는 장을 열어젖힌 인물들이었다.



1. 하이든 — 질서 위에 숨겨진 따뜻한 장

18세기 오스트리아의 궁정은 규율로 가득한 공간이었다.
하지만 하이든은 그 안에서 자유에 가까운 장을 만들었다.
그가 남긴 교향곡 94번 ‘Surprise’의 유머,
혹은 현악 4중주 Op.33의 생기 넘치는 리듬은
그가 음악가들에게 어떤 분위기를 주었는지 잘 보여준다.



틀리면 헐뜯지 않고,
불안해하는 연주자에게 눈을 찡긋하며
“괜찮아, 다시 해보자”라는 무언의 격려를 건네던 사람.
그 품격 있는 태도가 바로 그의 장이었다.



모차르트가 하이든에게
“아버지처럼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며 악보를 헌정한 것도 그 때문이다.
모차르트의 하이든 세트(Op.10) 현악 4중주는
하이든의 질서 위에서 천재가 춤추는 듯한 작품이다.



하이든의 장은 궁정이라는 폐쇄적 공간을
창조성과 따뜻함이 흐르는 음악의 집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 장에서 고전주의는 비로소 꽃을 피웠다.



2. 클림트 — 황금빛 감각을 태우는 장

20세기 초 빈은 혼란과 혁신이 공존하던 도시였다.
클림트는 그 혼란 위에 황금의 장을 펼쳤다.
그의 대표작 〈유디트 I〉, 〈키스〉는
화려함과 절제가 동시에 살아 있는 세계다.
곡선의 흐름과 금박의 떨림, 인간 몸의 관능성이
서로 아름답게 긴장한다.



클림트의 실제 스튜디오는
늘 젊은 예술가들과 모델들로 북적였다고 한다.
그는 긴 시간 포즈를 취한 모델에게
초콜릿을 건네며 고맙다고 속삭였고,
그 조용한 다정함이
사람들을 그의 공간에 머무르게 했다.



에곤 쉴레가 포트폴리오를 들고 찾아왔을 때도
클림트는 잠시 보고 말한다.
“당신은 멀리 갈 사람입니다.”
그 한 문장으로 쉴레는 빈 미술계의 중심으로 들어왔다.



쉴레의 〈포옹〉, 〈자화상〉에서 느껴지는 날 선 감정과 절규는
클림트의 황금이 깔아놓은 장이 없었다면
그토록 빠르게 태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클림트가 만든 장은
‘아름다움’이라는 오래된 틀을
감각의 혁명으로 바꾼 한 시대의 무대였다.



3. 듀크 엘링턴 — 재즈를 품격으로 이끈 장

뉴욕의 밤, 재즈 클럽은 자유롭지만 혼란스러운 장소였다.
그러나 엘링턴은 그 공간에
전혀 다른 종류의 품격의 장을 만들었다.
그의 음악 〈Mood Indigo〉,
혹은 크리스마스 모음곡을 재즈화한 〈Nutcracker Suite〉를 들으면
그 품격의 결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엘링턴은 밴드원 한 명 한 명의 손을 잡고
“Tonight was beautiful, man.”
이라고 속삭이곤 했다.
그 말로 평생 엘링턴 곁을 떠나지 않은 연주자도 있었다.



젊은 빌리 스트레이혼이
〈Take the A Train〉 악보를 들고 찾아왔을 때,
엘링턴은 그것을 곧바로
오케스트라의 새로운 문을 여는 열쇠로 삼았다.
그 장에서 스트레이혼은
〈Lush Life〉와 같은 서정적인 명작을 남겼고,
재즈는 ‘고급예술’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엘링턴의 장은
혼란스럽던 도시의 음악을
절제된 품격과 우아함으로 이끄는
보이지 않는 손이었다.



4. 예술의 꽃은 장에서 피어난다

하이든–모차르트,
클림트–쉴레,
엘링턴–스트레이혼.



세 시대의 예술은
한 명의 천재가 아니라
장을 열어준 대가 + 그 장을 건넌 젊은 천재
이 두 힘이 만나면서 비로소 완성되었다.



예술은 재능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예술은 장의 공기에서 시작된다.



따뜻한 장,
품격의 장,
자유의 장.



하이든의 음악, 클림트의 황금, 엘링턴의 재즈는
그 장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역사 속에 증명해주고 있다.



오늘 우리가 감탄하는 수많은 작품들은
결국 누군가가 조용히 펼쳐놓은
한 세계의 장(場) 위에서 자라난 꽃들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시덥잖은 농담들 (14) 콩쿨장에서 배운 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