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음악교육철학에서 오늘의 음악까지
20세기가 열리던 순간, 음악은 마치 오래된 거울 앞에 서서 스스로의 모습을 다시 들여다보는 것처럼 보였다.
르네상스가 인간에게 시선을 돌렸다면, 20세기의 음악은 음악에게 시선을 돌렸다.
“음악이란 무엇인가?”
이 간단한 질문은 인상주의, 표현주의, 미니멀리즘, 전자음악, 그리고 새롭게 부상하던 대중음악까지 전 방위에서 폭발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시대는 음악을 다시 재정의하고 있었고, 그 변화는 어느 한 장르에 머물지 않았다. 교회 안에서 울리는 예배음악 또한 이 흐름 안에서 자연스럽게 새로운 길을 열기 시작했다.
19세기 낭만주의의 거대한 감정의 유산은 20세기 초 두 갈래로 뻗어갔다. 하나는 드뷔시로 대표되는 색채의 길이었다. 그의 음악은 물결처럼 흘렀고, 목적지 없이 부유했다. 감정을 지시하기보다 감각의 표면을 펼쳐보이는 방식으로, 음악이 회화처럼 들릴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인상주의는 이렇게 탄생했다.
다른 갈래는 쇤베르크가 걸어 들어간 해체의 길이었다. 장조와 단조라는 오래된 집에서 벗어나 조성이 없는 황야로 들어간 그의 음악은 불안정했지만 인간의 내면—긴장과 주저함, 그리고 불안—을 그대로 반영하는 거울이 되었다. 12음 기법은 음악이 외부 세계를 묘사하지 않아도, 음악 스스로의 논리만으로도 존재할 수 있다는 급진적 가능성을 열었다.
드뷔시의 색채와 쇤베르크의 해체는 서로 반대 방향처럼 보였으나, 두 흐름은 하나의 공통된 질문으로 이어졌다. “음악은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미니멀리즘의 반복에도, 전자음악의 실험에도, 후대에 등장한 대중음악의 언어에도 반복적으로 등장했다. 음악이 표현할 수 있는 세계의 범위를 넓히려는 시도는 20세기 예술 전반을 관통하는 거대한 사상이었다.
대중음악의 탄생은 음악의 무게중심을 다시 사람에게로 끌어내렸다. 재즈는 즉흥이라는 언어를 되살려 음악을 악보에서 해방시켰다. 순간의 판단과 감정, 연주자들의 상호작용 속에서 음악은 다시 살아 있는 사건이 되었다. 이는 바흐 이전 시대의 연주 문화와도 닮아 있었다—음악은 본래 연주자와 청중이 함께 만들어가는 생동하는 행위였던 것이다.
록 음악은 이 생동을 더욱 증폭시켰다. 반복되는 리프는 리듬을 물질처럼 느끼게 만들었고, 집단 공연은 음악을 더 이상 조용한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공동체적 체험으로 변화시켰다. 이것은 훗날 교회의 예배 양상에도 깊은 흔적을 남긴다. 예배가 단순히 설명과 청취의 시간이 아니라, 음악을 통해 감정을 공유하고 참여하는 시간으로 변화한 것이다.
팝 음악의 부상은 멜로디의 힘을 극대화했다. 파편화된 시대의 감정을 가장 직관적인 선율로 전하며, 짧고 선명한 구조는 현대의 속도에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오늘날 예배곡의 후렴 중심 구조—빠르게 흡수되고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방식—은 바로 이 팝 음악의 흐름을 거의 그대로 반영한다.
힙합은 음악 안에서 언어의 위상을 다시 한 번 바꾸었다. 음악은 더 이상 선율만으로 말하지 않았다. 언어 자체가 리듬을 만들어내며 음악의 중심이 되었다. 성경의 시편 낭송, 중세의 응답송, 초기 회중찬송에서 보이던 말과 음악의 결합은 힙합에서 현대적으로 되살아났다. 말의 리듬이 곧 음악이 되는 세계—이는 종교적 전통과도 은밀히 맞닿아 있었다.
20세기의 음악적 변화는 음악교육철학에도 직접적인 파동을 일으켰다. 이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래된 논쟁이 현대적으로 재현된 장면이기도 했다. 리머는 음악을 심미적 경험으로 보았다. 음악의 구조와 질서, 조화와 균형이 인간의 감성을 성장시키며, 이는 플라톤이 말했던 “음악은 영혼의 형식”이라는 개념과 닮아 있다. 잘 구성된 작품을 감상하고 이해하는 것이 음악교육의 핵심이라고 보았다.
반대편에 선 엘리엇은 음악을 행위로 보았다. 연주, 즉흥, 창작, 협업—인간이 실제로 음악을 ‘하는’ 과정 속에 음악적 의미가 존재한다고 보았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의미는 행위로부터 온다”는 철학과 연결된다. 그래서 그는 재즈, 민속음악, 대중음악 모두가 동등한 음악적 경험이라고 주장했다. 음악을 하는 사람의 삶과 문화가 음악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리머와 엘리엇의 논쟁은 예배음악에서도 반복된다. 구조적 완성도를 지향하는 전통 찬송가는 리머적 미학을 따르고, 즉흥과 참여, 감정의 고양을 강조하는 현대 예배음악은 엘리엇적 관점의 산물이다. 한쪽은 아름다움과 질서를, 다른 한쪽은 삶과 실천을 강조한다. 이 두 갈래는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예배의 공간에서는 종종 자연스럽게 공존한다.
예배음악은 흔히 ‘교회 안에서만 울리는 음악’으로 인식되지만 실제로는 20세기 음악의 흐름을 가장 넓고 빠르게 흡수한 장르다. 전통 찬송가의 안정된 4성부 구조와 조화는 고전주의적 질서를 기반으로 하며 바흐의 대위적 사유와 밀접하다. 반면 현대 CCM은 대중음악의 언어와 구조를 거의 그대로 끌어오며 예배시간의 정서와 감정 형성에 큰 역할을 한다. 반복되는 코드 진행과 서서히 변화하는 화음, 긴 패드 사운드는 미니멀리즘의 미학과도 연결된다. 예배의 묵상적 순간은 이 반복 위에서 형성된다—단순함이 아니라 몰입의 구조이다.
오늘날의 송라이터들은 대부분 DAW 기반으로 곡을 작성한다. 이는 대중음악의 창작 방식과 동일하며, 음악 제작 방식에서도 교회는 이미 완전히 현대적이다. 유튜브나 스트리밍을 통해 예배곡이 전 세계로 퍼지는 방식은 음악이 더 이상 지역적 전통에 머물지 않고 세계적 네트워크 속에서 움직이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21세기의 음악은 중심을 잃었지만, 대신 다양성의 중심을 얻었다. 노트북 하나면 누구나 작곡과 편곡, 녹음과 믹싱까지 가능한 시대가 되었고 음악은 전문가만의 언어가 아니라 일상의 창작 언어가 되었다. 장르의 의미는 희미해졌고, 개인의 취향과 경험·정체성이 음악을 결정한다. AI는 새로운 음색을 만들고, 음악 창작의 문턱은 더욱 낮아지고 있다. “음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이제 “음악을 누가 만들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확장되었다.
이 변화는 예배음악에도 깊이 스며들었다. 각 공동체는 자신들의 정서에 맞는 곡을 스스로 만들고, 창작곡이 지역의 고유한 예배문화를 형성한다. 예배음악은 특정 전통을 반복하는 음악이 아니라, 오늘의 예배 공동체가 살아 있는 경험을 음악으로 변환하는 장르가 되었다.
서양음악 전체를 다시 바라보면 음악은 단 한 번도 하나의 길만 걸은 적이 없다. 고대의 말과 리듬, 르네상스의 조화, 바흐의 질서, 낭만주의의 감정, 대중음악의 참여, 전자음악의 실험, 미니멀리즘의 반복, 예배음악의 공동체적 울림—이 모든 흐름은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중첩되어 오늘의 음악을 만든다.
음악은 언제나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고 경험하는 방식의 반영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음악은 그 어느 시대보다 다양한 방식으로 인간의 경험을 담아낼 수 있는 상태에 도달했다. 서양음악의 기원에서 오늘의 음악까지—그 긴 흐름은 단절된 적이 없었다. 우리가 듣는 모든 음악은 과거의 기억을 품고 있으며, 미래를 향한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