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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시어리 Jul 05. 2024

[영화감상] 화양연화

찬란하고 아름다웠던 삶도 먼지쌓인 시간 앞에선 허무로 회귀한다.

화양연화

15세 관람가

감독: 왕가위

출연: 양조위, 장만옥


가랑비에 옷이 젖어가듯 시작되는 관계

당신의 시작은 언제인가? 사랑의 시작, 꿈의 시작, 우정의 시작 등 중요한 일의 시작이 기억나는가? 영화는 ‘수 리첸(장만옥)’과 ‘주모운(양조위)의 만남으로 시작된다. 얼핏봐도 선남선녀 두 배우의 등장인지라 이웃집에 사는 사람들의 사랑얘기겠거니 하고 시작부터 별로 기대하지 않은 채로 들어갔다. 둘 다 배우자가 있으니 진부한 불륜이야기이겠거니.

하지만 영화의 포커스는 사랑이 아닌 서로에 대한 무관심에 초점을 맞춘다. 서로에 대해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특별히 엮이지 않는다. 이삿짐이 바뀌든, 우연히 마주치든 무미건조하게 바라보고 차갑게 대화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차가움이 둘의 사랑을 기대하게 만든다. 둘의 무미건조한 인사 속에서 관객은 긴장하게 된다. 둘이 부도덕적으로 가까워질 어떠한 요소도 없었다.

이 상황에서 카메라는 집착적으로 무미건조한 그들의 마주침을 포착한다. 애정의 의미는 전혀 없는 장면들을, 사랑이 시작될 기미라곤 보이지 않는 부분들을 모조리 찍는다. 그러던 중 어느 순간 관객들은 깨닫는다.

“아! 이 둘의 관계는 이미 시작했구나.“

어떠한 일의 시작은 분명히 있다. 하지만 그 시점이 언제인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특히나 사랑은 더욱 그렇다. 어느 순간 시작했고 어느 순간 끝이났다. 그 순간이 명확하지 않기에 더욱 설레이고 더욱 슬프다. 이미 관객들은 이 둘의 시작에 대해 윤리적 거부감은 사라져있다.


선을 알고 있다고 넘지 않을 수 있을까?

‘수 리첸’과 ‘주 모운’은 서로의 배우자의 외도를 알아채고 대화를 하게된다. 배우자의 외도라는 말할 수 없는 아픔과 그 당사자가 상대방의 배우자라는 사실이 둘의 만남을 정당화한다. 그리고 그 만남 조차도 자신의 배우자를 챙기는 대화가 섞여있어서 더욱 안타깝다.

서로의 배우자가 외도로 자리를 비운 상태이기에 리첸과 모운은 자연스레 친구같은 만남과 대화를 갖게 된다. 외도의 시작이 무엇이었을지, 배우자들이 서로 뭘 좋아하는지, 그리고 리첸과 모운 서로의 취미는 무엇인지.

만남 속에서 혹여라도 넘을지 모르는 선을 지키려 노력한다. 오해를 사지 않게끔 따로 들어가고 스킨쉽과 애정섞인 대화를 최대한 피한다. 선을 넘지 않으려는 둘의 노력이 관객에게도 충분히 전해진다.

하지만 ‘가장 찬란한 시절의 두 남녀’는 서로를 의식하기 시작하고 넘어야 하지 말아야 할 선 앞에서 줄타기를 하며 갈팡질팡한다. 선을 알고 있어서 오히려 그 선에 가까워지게 된다.


관음을 통해 덜어낸 거부감

이 둘의 관계를 자연스럽게 따라가게 하는 연출들이 너무 환상적이다. 두 사람이 한 공간에 있어도 거울을 이용해 둘의 사이를 분리해낸다. 하지만 그 속에 담겨있는 배우들의 눈빛은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하다. 마음가는대로 행할 수 없는 둘의 처지. “결혼하지 않았으면 어땠을 것 같나요?”라는 배우의 대사는 배우자의 외도 때문에 겪는 고통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둘 사이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결혼하지 않은 채로 만났다면 어땠을까?‘ 하는 마음이 그 둘을 힘들게 만든다.

누군가는 ”어째됐건 맞바람 아니야?“하고 물어볼 수 있다. 윤리적으로 옳지 않은 행동에 대해 아름답게 그리는 이 영화에 대해 도덕적 거부감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이 영화는 관음이라는 방식을 선택했다.

이 영화는 둘의 만남을 숨어서 지켜본다. 창문 사이에서, 문 뒤에서, 나무 사이에서, 자동차 뒤에서 숨어서 지켜본다는 사실이 이 둘의 비밀스러운 만남을 강조하고 포착해내는 한편, 그 행위로 인해 느껴지는 도덕적 거부감을 완화시킨다. 관객은 둘의 관계에 대한 참여자에서 방관자가 된다.

몰래 지켜보는 방식을 선택한 탓에 배우자의 외도에 대한 분노조차 없다. 따라서 ‘수 리첸’이 남편을 떠날 수 없다고 할 때도 답답한 마음보다 상황이 그렇다는 생각이 들며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결국 둘은 마음의 선을 넘은 것을 인정하고 이별을 결심한다. 배우자의 외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 할 수 있지만 그 둘은 윤리적이라 할 수 있는 선택을 한다.



말할 수 없는 진실을 묻어두는 방법

영화의 마지막에 완전한 이별을 한 채로 등장한다. 관객은 둘이 잠시라도 만나길 바랬지만 만나지 못한다. 둘만 아는 비밀을 가진 채로 살아간다. 가장 찬란했던 시절의 비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사랑을 표현할 수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한 사람은 이 비밀을 자신의 마음 속에 묻어둔다. 그리고 추억 어린 장소에 머무르고자 한다. 추억어린 장소는 이미 추억과 관련된 사람들이 떠나고 활기참이라곤 완전히 사라진 곳이다.

다른 한 사람은 이 비밀을 폐허(앙코르와트) 기둥에 묻어둔다. 찬란했던 그 순간을 찬란했었지만 폐허가 되어버린 공간에 묻어둔다.

아무리 찬란했던 순간도 시간이 흐르며 기억이 되고 더 흐르면 폐허가 된다. 어딘가에 잘 묻어두어야 하는 순간이 온다. 나의 찬란했던 순간을, 찬란한 이 순간을 묻어두어야 하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나는 어디에 묻어야 할까? 내 몸일까? 아니면 나무일까?



선과 면 그리고 음악

이 영화는 직선이 참 많이 강조된 것 같다. 창문, 문, 커튼, 거울과 같은 직선으로 구성된 사물이 많이 나온다. 그리고 두 배우가 그 선을 넘나든다. 옆 집 사람을 보기 위해 문을 지나가고 거울을 보고 창문을 본다. 그리고 그 장면을 또 다른 선 뒤에서 관객이 지켜본다. 관객은 그 가운데 선을 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없어진다.

이 지점에서 많은 생각이 든다. 과연 이별이 윤리적 선택이었을까? 가지고 있던 윤리적 기준이 흔들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또한 찬란한 붉은색과 죽어있는 회색벽의 대비도 눈에 띈다. 붉은 커튼으로 그들이 얼마나 뜨겁고 찬란한 시기인지, 폐허의 회색으로인해 먼지 쌓일 시간에 대한 아쉬움이 느껴진다. 강렬한 대비 속에서 더욱 몰입하게 된다.

의도인지 모르겠지만 대표적인 BGM은 현악기 음악이다. 그 둘의 아슬아슬한 관계를 현악기의 연주로 표현해준다. 선 위에서 줄타기를 하는 음악은 둘의 관계를 더욱 의미심장하게 만들어준다.


화양연화

머뭇거림 속에 시간을 물 흐르듯 지나간다. 돌이켜보면 먼지쌓인 시간들이 한 가득이다.

찬란했던 내 시간은 영원할 것 같았다. 하지만 붉게 물들었던 내 시간은 회색빛이 드리우기 시작한다.

화양연화, 머뭇거리며 보내지 말자.

열심히 먼지를 털어내며 찬란함을 살아가자.

찬란하고 아름다웠던 삶도 먼지쌓인 시간 앞에선 허무로 회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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