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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아웃, 오기는 하는걸까?

요즘 번아웃이 가지는 개념은 잘못 쓰이고 있다

by 생각하는뇌


"나 번아웃인가봐."


요즘 많이 들리는 말이다. 삶이 지치고 힘들 때를 표현하기에 가장 적당한 말인 것 같기도 하다. 탈진, 에너지 소진이라는 단어보다 더 직관적이고, 더 강한 느낌이니까. 우리가 쓰는 표현 중에 가장 비슷한 느낌이라면 "한 줌의 재만 남을 때까지" 정도겠지.


그런데 번아웃이 정말 있는걸까? 사실 조금 의문이긴 하다. 주6일제로, 거기에 최대 40시간 같은 제한도 없이 일하시던 부모님 세대에도, 한국전쟁 이후 자식들을 먹이기 위해 계속 몸을 움직인 전후 세대에도 번아웃이라고 명확하게 정의된 개념은 없었으니까. 그분들이 보기에는 번아웃은 그저 글러먹은 정신상태를 포장하는 느낌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주변에 번아웃을 운운하는 친구들도 말만 그렇게 할 뿐, 실제로 하루라도 더 일을 하면 죽어버릴 것처럼 심각한 친구들은 많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번아웃은 실제로 존재한다. 다만 우리가 생각하는 번아웃과 실제 번아웃 개념 사이에 꽤 큰 범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번아웃, 어디서 나왔나?


번아웃 증후군은 영어로 Burnout syndrome 혹은 Occupational burnout이라고 한다. 후자의 경우 직장에서(occupational) 일어나는 경우에 더 초점을 맞추어 표현한 용어일 뿐, 둘 다 의미하는 바는 같다. 그리고 그 이름답게 번아웃 증후군이라는 단어가 처음 쓰인 곳도 직장이었다. 1974년 미국의 심리학자 허버트 프로이덴버거(Herbert Freudenberger)는 자신이 운영하는 무료 약물 중독 클리닉 센터에서 자원봉사자들이 탈진 현상을 겪는 것을 보았다. 이 현상은 일반적인 신체적 탈진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고, 이를 설명하기 위해 학계에서 번아웃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이 시초였다. 이후 그 단어가 점점 은행원, 상담센터 직원, 선생과 같은 감정노동자 전체로 확장되었고, 지금은 전 노동자에게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용어가 되었다.


지금 번아웃의 위험성은 세계 전체에서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다. 세계 보건 기구(WHO, World Health Organization)는 완벽하지는 않아도 질병의 종류에 대해 가장 범용성이 높은 질병 분류 체계를 제공한다. 그런 그들이 2022년, ICD(International Classification of Diseases)의 새 개정판인 11판을 발표했는데 여기에 번아웃 증후군이 포함되어 있었다. 참고로 이전 버전의 ICD 10판은 1994년부터 지금까지 약 20년간 각 국가에서 자국 표준 질병 체계를 만드는 데에 사용되었을 정도로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그런 만큼 번아웃이 11판에 포함되었다는 사실은 전세계적 관심이 번아웃을 향하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다만 번아웃을 즉시 치료가 필요한 정신 질환이나 질병으로 보지는 않았다. WHO는 번아웃을 "건강 상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요인"까지로 보았고, "특정한 직업과 관련해 발생하는 현상을 가리키며 삶의 다른 영역의 경험을 묘사하는 데 적용해선 안 된다”고 덧붙였다. 다른 일상에서 느끼는 우울감이나 무기력을 번아웃과 구분지으려고 한 것이다.


지금에야 번아웃이라는 단어가 각종 무기력증을 표현하는 데에 널리 쓰이고 있지만, '진짜' 번아웃은 WHO에서 구분한 것처럼 직장에서 특히 일어나는 신체적/정신적 탈진만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그 개념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았던 탓일까, 점점 많은 사람들이 일상적인 무기력이나 다른 스트레스 반응에도 번아웃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지금처럼 우울증에 가까운 증상을 돌려표현하는 말이 되었다. 그렇기에 번아웃 이야기를 많이 들어봤어도 실제로 진짜 번아웃에 빠져 치료받는 사람을 보기는 쉽지 않다. 예를 들면 - 기억력 및 집중력 손상, 인내력 소실, 감정적 불안함, 수면 장애, 통증이나 소화 장애같은 신체적인 증상처럼 심각한 경우를 겪는 사람을 말이다.


아직 번아웃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어떻게 대처를 해야할지에 대해서는 여러 전문가들의 갑론을박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니 번아웃이라는 단어를 편하게 쓰는 것은 좋지만,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내가 정말 번아웃인가?'라고 의심하면서 일을 계속하기를 멈추는 것은 좋지 않다. 왜냐하면 번아웃은 내가 힘들지도 모른다는 판단의 근거가 되어도, 심각한 정신병이나 질병까지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떤 증상이 번아웃이고 어떤 증상이 번아웃이 아닐까? 다음 글에서 우울증과 번아웃을 비교해보며 그 답을 찾아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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