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생명과학의 발전을 DNA 구조의 발견 이후로 분석하며
생명과학의 발전은 기술의 발전이 없으면 불가능했다. 생명과학 연구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현미경은 빛의 굴절(물리학)을 이용하여 물체를 확대하는 기구다. 뇌과학 연구에 한 줄기 빛이 되었던 CT(Computed tomography)도 물리학자 앨런 코맥(A. M. Cormack)이 만들었다. 그러니 당연히 생명과학의 발전은 충분한 기술을 만들기 전에 다른 과학이 얼마나 성과를 보여주느냐에 달려있다.
그러면 생명과학의 시작은 언제로 봐야 할까? 누군가는 고대 이집트 때부터 내려온 생물 지식을 시작으로 볼 수도 있고, 1865년의 멘델의 유전 법칙을 생명과학의 시작으로 볼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필자는 1953년 DNA의 구조가 밝혀진 것을 생명과학의 시작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그전까지는 생명의 가장 중요한 특징인 유전에 대해 제대로 연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멘델이 유전 법칙을 만들었을 때에도 그는 유전이 하나의 특성이라고 생각했지, 유전 물질이 물려받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DNA의 구조를 밝혀내고 나서야 유전을 물질로 볼 수 있게 되었다. 마치 아인슈타인이 '빛이 파동이자 입자'라고 그 정체를 밝혀낸 후 물리학의 판도가 뒤집힌 것처럼 생명과학에게 있어서 DNA의 구조 발견은 'DNA를 우리가 조작할 수 있다'라는 어마무시한 생각의 전환을 만들었다.
처음엔 DNA를 만지작거리는 것에 집중했다. DNA를 더 많이 만들어보기도 하고, 발현량을 줄여보기도 하고, 아예 빼버리기도 하면서 생물에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를 살펴보았다. DNA와 같은 작은 분자 수준에서 생명 현상을 이해하는 학문. 이것이 분자생물학(molecular biology)의 탄생이었다.
DNA의 발견은 분자생물학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기존에 있던 세포생물학(cell biology)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세포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하나를 알게 되니 세포의 안에서 일어나는 활동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유전자 발현 조절, 세포 분열, 세포 사멸과 같은 활동이 어떻게, 왜 일어나는지를 연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런 변화에 염색(staining)이나 GFP(green fluorescent protein)처럼 세포 내부를 관찰할 기술도 늘어나니 점점 더 많은 신호 전달 경로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DNA의 발견 이후에도 1990년대까지 생명과학의 연구는 굉장히 운에 의존하는 방식이었다. 세포 안의 한 부분을 찍어서 그걸 분석한다. 마치 광활한 모래사장 위에 구슬을 던져서 그 아래를 파 조개가 있는지 확인하는 방식이었다. 운이 좋아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면 성공이고, 운이 없으면 그냥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 이런 불편한 상황 속에서 1990년대 microarray 기술의 등장은 혁명적이었다.
Microarray는 모래사장에서 조개를 찾을 때 위에 물을 뿌리고 숨구멍이 생기면 그것을 파는 것과 비슷했다. 당연히 아무 정보도 없는 것보다 결과를 얻을 가능성이 더 커졌다. 특정 물질을 '지정'하지 않고 전체를 한 번에 분석해 가능성이 높은 것을 '발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컴퓨터 기술도 발달하고, DNA 서열을 분석하는 시퀀싱(sequencing)도 발달하며 2000년에 human genome project가 시행되었다. 이로써 하나의 분자, 하나의 세포에서 벗어나 전체적인 시스템을 한 번에 분석할 수 있게 되었다. 시스템 생물학(system biology)이 발달한 것이다.
그러나 초기의 시스템 생물학도 시간이 지날수록 한계가 보였다. 예를 들어 암이 있는 부위를 분석하면, 분명 그 안의 암세포 중에는 자체적으로 자멸하는 경우도 있고 악성으로 다른 곳에 전이하는 암세포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초기의 시스템 생물학은 그 부위를 전부 으깨서 그 안에 있는 한 종류의 분자를 오믹스(omics, 특정 분자 종류 전체를 분석하는 방법)로 분석한다. 이렇게 부위로 뭉뚱그려서 분석하면 결국 구할 수 있는 것은 개별 세포가 아닌 평균이다. 분명 전이되는 암세포는 그렇지 않은 세포와 차이가 있겠지만, 이 방식으로는 평균만 나오니 그걸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더 정확한 메커니즘을 연구하려면 세포들 하나하나가 서로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를 분석할 필요가 있었고, 이것이 요즘 시스템 생물학이 하나의 세포(single cell)에 집중하는 이유이다. 2020년도쯤부터는 세포들 간 관계뿐만 아니라 그 세포부위가 우리 몸의 어디에 있는지에 따라서 형질이 달라진다는 점에 주목해 공간생물학(spatial biology)이라는 분야도 만들어졌다.
앞으로 어떤 것이 또 생명과학의 대주제가 될지는 모른다. 거기에 필자가 적은 것은 생명과학의 극히 일부인 시스템 생물학을 주류로 정하고 작성한 것이기에 다른 전문가가 보는 입장은 또 다를 수도 있다. 그러나 1953년부터 아직 100년도 제대로 달리지 않은 생명과학이 얼마 전 있었던 팬더믹을 해결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했다. 그저 죽기 전까지 얼마나 이 생명과학이 발전할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떤 결과물을 우리가 누릴 수 있을까 기대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