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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ing보다는 becoming

by 한꽂쌤

심리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필수적으로 접하게 되는 성격심리학이라는 과목이 있다. 인간의 성격은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독특한 부분이 있다는 점이다. 이 말을 다시 바꿔 말하면 같은 상황에서도 서로 다른 개인차를 보인다는 것이다.


인본주의적으로 바라보는 인간의 모습도 다르지 않다. 개인으로서의 인간을 독특한 존재로 여기고 바라보아야 한다는 접근이다. 인본주의적 접근은 인간의 과거 어린 시절의 경험이 그 사람의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고 보는 프로이트의 이론을 거부했고, 한 개인으로서의 느낌과 생각은 무시하고 환경에 의해 통제되는 인간으로서의 접근을 강조하는 행동주의 이론을 거부하며 생겨났다. 인본주의 심리학회에서는 인간은 맥락 속에 존재하며 인간은 선택하는 존재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요즘 젊은 층들을 보면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살아보려고 애쓰기보다는 보다 안전하고 보다 실용적인 미래를 위해 전력질주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학과를 선택하기보다는 성적에 맞는 학과를 급하게 선택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직업을 선택하기보다는 남들에게 창피하지 않을 만큼, 자신의 자존심을 살려줄 최소한의 직업을 선택한다. 자신의 몸값을 올려 좀 더 많은 급여를 받는데 관심이 집중되어 어떤 스펙을 쌓으면 그렇게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정보를 얻기에 조급해하고 있다.


사람들은 대부분 다른 사람들이 선호하고 열광하는 방향으로 따라가는 것을 당연시 여기는 듯하다. 그래야 그 길이 잘못된 길이라도 혼자만 잘못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에 덜 불안한 이유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위안을 볼모로 자신의 소중한 선택의 기회를 포기한다는 것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다른 사람들이 바라보는 곳을 바라보고, 다른 사람들이 가려던 길을 가려는 사람은 경쟁력에서 뒤처지게 마련이다. 자기만이 가진 독특한 그 무엇이 있어야 하는데 그 무엇을 찾고 발현시키기 위해서는 자신을 향한 신뢰와 용기가 필요하다.


어릴 때부터 시키는 대로 공부하고 시키는 대로 선택해왔던 수동적인 삶은 자기 스스로 선택해서 성공했던 경험의 부재를 낳는다. 이러한 경험은 결국 '나는 무엇을 선택할 만큼 능력이 없어' '내가 스스로 선택했다가는 실패하고 말 거야'라는 부정적 자기 신념을 만든다. 이러한 신념은 결국 자신감을 빼앗고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기억마저 흐릿하게 만든다.


실존주의 심리학자 메이(May)는 인간(human being)이란 용어에서 되어가는 존재로서의 인간 즉, 되어가는(becoming)이란 말을 강조하였다. 도토리 한 알이 가진 잠재력은 도토리나무가 되게끔 되어 있지만 인간이 자기 자신이 되려면 자신에 대한 제대로 된 자각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자신에 대한 자각의 기회가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자기에 대한 책임도 타인이나 사회에 전가시키고 있다. 자신에 대한 자각이 일어나지 않을수록 자신이 져야 할 책임감도 줄어들게 마련이다. 다른 사람 때문에, 불공평한 사회 때문에, 잘못된 ~ 때문이라고 외치는데 습관이 된 사람은 절대 자신으로서의 성장을 기대할 수 없다.


아들이 초등학교 저학년이었을 때 부모 참관수업에 참관하기 위해 학교에 간 적이 있다. 아들이 있는 교실에 들어가 맨 뒤에 서서 다른 학부형들과 함께 해당 수업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가 무슨 수업이었는지 기억에는 없지만 그때의 느낌은 정확히 기억이 나기에 적어보려 한다. 앞에서 설명하시는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어린 학생들은 여기저기서 손을 들고 발표를 하였는데 그때 자신의 별명에 대한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는 시간이었다. 아들의 별명이 무엇일까? 궁금해하던 차에, 순서가 되자 아들의 별명이 밝혀졌다. 바로 '나무늘보'였다. 그리고 하나 더 '오징어'였다. 설명을 들어보니 너무 동작이 느리고 늘어져서 그런 별명이 붙은 모양이었다. 아주 잠깐 내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했는데 이내 정신을 차리고 아들의 표정과 느낌이 어떨지 궁금해졌다. 뒤에서 지켜보던 나는 아들의 표정이 보이지 않아서 나중에 물어볼 수밖에 없었는데 나의 질문에 대한 아들의 대답은 '별생각 없는데?'였다. 나는 그 당시 또다시 정신이 몽롱했다. 엄마인 나는 솔직히 조금은 부끄럽기도 했는데 아들은 전혀 그런 기색이 없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너는 괜찮다고?'라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뻔했지만 용케도 잘 삼키고 '그래,,,,우리 아들이 그렇다면 그런 거지'라고 하며 넘어갔다. 아들은 유난히 어릴 적부터 느렸다. 행동도 느리고 말도 느리고 표정도 느렸다. 학교 체육대회 때 달리기 시합을 하면 아들은 그냥 걸어서 완주했다. 그러고 나서 늘 아들은 '나는 이게 뛴 건데?'라고 하며 천진난만하게 나를 쳐다보았다. 아들이 괜찮다고 하니 나도 괜찮을 수밖에 없었다. 아들에게 더 이상 무슨 말을 더 할 수도 없었다. 그 이후부터는 아들의 느린 속도를 보고 전혀 속 태우지도 않고 전전긍긍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그 아들이 지금은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다. 지금도 느리고 늘어진 모습은 그대로다. 그러나 그 아이만의 속도가 있음을 정확히 알 수 있다. 아들은 자신만의 속도로 자신이 되어가는 과정이 분명히 있었다. 느리지만 스스로 고등학교 진학을 인문계가 아닌 마이스터고등학교로 선택했고 지금은 취업준비를 하고 있다. 기업체로 취직을 하든지 공무원 시험을 보든지 2가지 선택지를 가지고 막바지 사회진출을 준비하고 있다. 자격증 취득이나 성적 수준도 스스로 만족하는 수준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지켜보는 부모 입장으로서는 아이 스스로 선택하는 것들에 있어서 최대한 존중해주려 한다.


만약 내가 아들이 초등학교 저학년 때 '너는 그런 별명을 듣고도 괜찮니?'라고 하며 나무랐거나 '남들이 너를 어떻게 보겠니'라며 다른 사람들 입장에서 아들을 바라봤다면 얼마나 아들이 속상했을까를 생각하면 아찔하다. 그때 내가 아들을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며 채근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하면 가슴을 쓸어내리게 된다. 다행히 나는 위기를 넘기고 아들을 믿어주었다. 아들이 가진 느림의 속도를 아들의 특성으로 인정해주었기에 아들은 자신의 '느림'을 자신에게 있는 '독특한 특성'으로 받아들이며 학교에서 적응하며 살듯이 사회에서도 적응하며 살 것이라 여긴다.


인본주의 심리학에서는 개인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강조한다. 이러한 자유는 결국 스스로 자신의 삶을 책임지는 삶으로 완성된다. 책임지기 싫어하는 사람은 선택하기를 주저한다. 주저하기를 넘어서서 두려워한다. '혹시나 잘못 선택하면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에 선뜻 방향키를 자기 스스로 돌리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 틈에 섞어 함께 몰려다니기를 원한다.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함께 휩쓸려 가면서 그 목적지가 어디인지는 관심이 없다.


자신에게 어떠한 씨앗이 있는지, 그 씨앗이 나중에 어떠한 나무가 되는 것인지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 현재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이 내가 원해서 하고 있는 것인지, 내가 표현하고 있는 것이 내가 느끼는 것들인지 살펴보아야 할 때이다. 자신에 대한 신뢰가 없고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람들은 자신을 드러내는데 어려움을 호소한다. 어린아이 일 때는 그럴 수 있구나라고 여겨지지만 성인이 된 이후에는 회피하는 사람으로 전락하고 만다. 나이가 먹으면 자연스레 성숙하는 게 인간이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인간의 성숙은 절대 양적인 부분과 비례하지 않는다. 자신을 책임지고 자신을 성장시키려는 성숙은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저절로 되는 부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앞으로 갈 건지, 지금 이대로 살 것인지, 아니면 과거로 다시 돌아갈 것인지 우리 각자의 선택에 달려있다. 각자 선택했다면 당연히 그 책임도 각자의 몫이 된다. 우리는 이미 완성된 존재가 아니고 되어가는 존재이다. 우리의 삶은 우리의 생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성장할 수 있다. 지금 당장 내 삶이 끝난 것처럼 위기의 순간과 절망의 순간이 와도 이미 끝난 것은 아니다. 다시 내일이 온다. 인간이 성장한다는 것은 완벽함과는 거리가 먼 얘기다. 완벽한 삶을 사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지 말아야 해'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서 나는 망했어'라는 사고는 예측 불가능한 삶으로부터의 도전이기 때문에 무모하다고 볼 수 있다. 우리의 삶에 일어나지 않을 일은 없다.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고 아무런 고통이 없기를 바라는 인생을 꿈꾸기보다 그런 일이 일어난 현실을 인정하고 대안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자세가 성숙한 사람의 자세이다.


인간은 늘 불완전한 존재이다. 잘해보려 했지만 실수할 때가 있고, 최선을 다했지만 노력한 만큼 결과를 얻어내지 못할 때도 부지기수이다. 성숙한 나를 꿈꾸기보다 성숙되는 나를 꿈꾸며 조금씩 나아가는 삶이야 말로 진정으로 성숙한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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