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연락이 뜸했던 친구가 안부를 물었다. "그동안 잘 지냈어?"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온 질문에 겸연쩍어하며 '당연하지. 뭐 별일이 있었겠어? 잘 지내고 말고"라는 대답이 반사적으로 나가버렸다. '어? 내가 하고 싶었던 대답이 아닌 거 같기도 하고....' 순간적으로 뱉어버린 답변에 당황스러웠지만 다시 수정하기에도 애매했다. 잘 지낸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나도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알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의례히 '잘 지내고 있어'라는 말을 내가 들으며 뭔가 불편했다.
회사원 수영 씨는 누군가가 나에게 '별일 없지?'라며 소소한 안부를 묻는 것조차 하지 말아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이런 마음을 갖고 있는 자신이 이상한 지도 물었다. 상대방이 자신에게 하는 가벼운 인사말에 대답하려니 힘이 드는 모양이다. 자신이 어떻게 지내는지 자신조차도 알기 두려워하는 찰나에 혹여나 자신도 모르게 그 두려움이 새어나갈지 모르기 때문에 오는 불안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경우가 지속이 된다면 사람을 만나는 것도 피하게 되고 말을 건네고 주고받는 것 자체가 부담이 된다. 사람은 관계를 통해 힘을 얻고 성장하며 서로를 의지하게 마련이지만 수영 씨가 경험하는 관계는 오히려 상처가 되니 안타까운 일이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소통을 잘하기 위해서 중요한 부분이 공감이다. 공감을 통해 슬픔을 나눠갖기도 하고 기쁨을 나눠갖기도 한다. 사람은 관계를 통해 성장하는 동물이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의지하고자 하는 욕구는 당연한 것이다. 누군가에게 의지가 되어주기를 자처하는 사람은 상대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타인을 향해 기꺼이 한쪽 어깨를 내어주고 한쪽 귀를 내어주고 한쪽 손을 내어줄 수 있는 인간이기에 어쩌면 지금까지 멸종하지 않고 살아남아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열린 마음으로 기꺼이 도움 주기가 자연스러운데 비해 자기 자신의 필요를 누군가에게 요청하기를 머뭇거리는 경우가 많다. 사실 이 이야기는 내 이야기이기도 하다. 남들에게 도움을 청한다는 것은 여러 번 고민을 해야 하고 웬만하면 내가 어떻게든 해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힘든 순간들이 많았다. 아마도 내 마음속 깊숙이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도움이 필요해서 도와달라고 표현하는 것은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망설이는 이유가 무엇일까. 혹시나 내 부탁을 거절하지는 않을까. 혹시나 나를 약하게 보지는 않을까. 혹시나 나의 부탁으로 인해 곤란해하지는 않을까 하는 등의 근거 없는 위험을 기꺼이 감안해야 할지도 모른다.
자신의 말을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도 술술 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참의 시간을 보낸 이후에야 속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하기도 한다. 아들이 초등학교 저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한결같이 같은 말을 했다. "어머님.... OO이가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해서인지 자꾸 친구들이 OO 이에게 짓궂은 장난을 해요. 알고 계셔야 할 것 같아서요"라는 내용이었다. 2학기가 지나 10월이 다되어가면 다시 담임선생님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어머님... OO이가 친구들과 이제야 친해져서 잘 지내고 있어요"라고 말이다. 아들은 학년이 바뀌어 새 친구들과 어울리게 되는 학기 초에는 관계 맺는데 서툴렀던 모양이었다. 아들은 자신만의 속도로 친구들과 관계를 맺으며 별 탈 없이 지냈던 것이다. 기다려주면 될 일을 어른들은 걱정부터 한다. '모든 사람은 처음 만나기 시작하면서부터 절친이 되어야 한다'는 듯이 말이다.
상담을 하다 보면 처음부터 마음을 활짝 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1년이 지나도록 마음 문을 열지 않고 경계심을 풀지 않는 경우도 있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하나씩 둘씩 마음속 묻어둔 이야기를 꺼내면서 상대방이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는지 여러 번 확인하곤 한다. 혹시나 상대방이 자신을 이해해 줄지, 비난을 하지는 않을지,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하지는 않을지에 대해 조심스레 살피면서 말이다.
의지한다는 단어는 왠지 '당신은 약해 빠졌어"라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왜 이다지도 '의지'라는 단어는 모양새가 뒤틀린 채 사용되고 있는지 안타깝다. 의지가 필요 없는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 의지가 싫다는 사람은 진심으로 하는 말일까. 어쩌면 '의지하고 싶다'라는 말을 거꾸로 하는 것이 아닐까. 다른 사람에게 의지를 해야만 한다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다만 의지하지 않고 홀로 잘 살 수 있다고 장담하는 사람에게 '의지해야 해요. 그래야 건강해요. 사람은 다 그래요'라며 강요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단단히 눌러놓았던 마음이 혹여나 당신을 고통스럽게 하지는 않을까 하여 염려는 된다. 일부러 타인에게 자신의 힘든 마음에 대해 표현하지 못하더라도 자신만은 그 마음을 모른 채 하지 말자. '이 정도 가지고 비실대면 안 돼' '내가 너무 예민해서 그런 거야' '이 정도쯤은 별거 아니야'라는 생각 때문에 하려던 말을 꿀꺽 삼킨다면 억압했던 마음이 한순간에 폭발해서 오히려 관계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자신의 이야기를 드러내는데 어색한 사람들에게 '편하게 이야기해보세요'라고 한들 한순간에 그렇게 되기란 쉽지 않다. 잔뜩 웅크려져 있던 근육을 한꺼번에 펴게 한다면 통증으로 인해 고통스러운 것처럼 천천히 근육을 이완하듯이 표현하려는 마음도 아주 조금씩 시작하면 좋다. 많이 표현하기보다는 아주 조금만, 큰 주제보다는 소소한 주제를, 먼 과거보다는 지금 현재를, 애매모호한 마음이나 감정보다는 구체적 표현이 용이한 표면적인 상황이나 상태에 대한 주제도 좋다.
자신의 이야기를 남에게 하는 것, 나의 마음이 이렇다는 것을 누군가에게 표현하는 것이 못나 보이거나 미숙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만 귀를 기울이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에만 익숙해져 있는 당신이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내 생각은 이렇다고, 당신의 말을 듣고 보니 이런 마음이 든다라고 말하는 것은 언제나 옳다. 상대방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도 아니며 이기적인 모습도 아니다. 한 사람으로서 한 사람에게 보내는 자연스러움 자체이다. 그동안 해보지 않았던 무언가를 새롭게 시도한다는 것이 어색할 수 있다. 두려울 수 있다. 불안할 수 있다. 그럴 수 있다.
자신 안에 수치심이 있거나 자기 가치감이 부족한 경우 그럴 수 있다. 그럴 때는 과감하게 인정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가 없는 경우 다른 사람들의 반응에 예민하게 된다. 상대방의 작은 행동에도 불안하고, 과장되게 해석하기도 한다. 상대방은 나의 말을 잘 들어줄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 내 말을 이해해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렇듯이 상대방의 반응까지 신경 쓰면서 시나리오를 완성해버릴 필요는 없다. 내가 표현할 수 있는 만큼 해도 괜찮다. 상대방은 상대방의 마음 그릇만큼 반응해줄 테니 그 부분은 그 사람의 몫으로 남겨두면 어떨까.
가끔은 내가 이렇다는 것을 표현해도 좋고, 가끔은 내가 좀 기대고 싶다고 응석을 부려도 좋다. 적당한 퇴행은 훨씬 더 그 사람의 인간미를 느끼게 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아 저 사람도 저런 면이 있구나'라는 동질감이 느껴지면 날이 서있던 긴장감도 줄어들고, 두껍게 느껴졌던 벽도 얇아지기도 한다. 자신의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표현하는 게 어려워하는 당신이라면 조금은 다른 사람에게 기대도 된다고 말하고 싶다. 언제나 홀로 서려한다면 외로울 수밖에 없다. 성숙한 사람은 적당히 의존할 줄 아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