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네)게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내적동기, 외적동기

by 한꽂쌤

대학의 마지막 학기에 자격증 시험공부를 준비하고 있는 지영 씨는 '동기가 없으니 공부에 집중할 수가 없다'며 자신이 한심해 보인다고 말한다. 다른 동기들은 스펙이다 뭐다 하며 다양한 경험도 하고 틈틈이 자격증도 준비하는 모습을 보면 괜스레 마음이 초조해진다고 한다. 그러나 문제는 마음은 초조한데 막상 자신은 그렇게 안된다는 사실이다.

동기란 내적인 동기가 있고 외적인 동기가 있다. 내적으로 동기화된 행위는 그 행위 자체 외에는 딱히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보상이 없는 행동이다. 다시 말하면 그 행동이 다른 외적인 보상을 주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행동 그 자체를 위해 만족감을 갖고 행동할 뿐이다. 예를 들면 호기심, 흥미, 즐거움, 욕구 등이다. 우리가 사랑을 할 때에도 그 자체가 좋아서 하는 것이지 무엇을 바라고 하는 것은 아닌 것처럼 말이다. 외적인 동기는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서 외부로부터 오는 보상을 기대하면서 하는 행동이다. 돈, 명예, 성적, 긍정적인 피드백 등이 이에 속한다. 때로는 어떠한 부정적인 것들을 피하기 위해 하는 행동도 외적으로 동기화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내 가슴을 설레게 하는 일들은 사실 외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고 연인끼리 서로를 사랑하고 창작활동을 하는 예술의 행위도 그 자체가 가장 큰 동기가 될 수 있다. '직장 생활하시기 힘드시죠?'라고 질문을 하면 '먹고살아야지 어쩌겠어요'라는 대답이 오는 이유는 내적 동기가 없이 외적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월급을 받아서 더 넓은 집을 사고 더 큰 자동차를 사는 등 자신의 부를 축적시키는 것도 외적 동기에 해당한다.


최근에 만난 중학생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공부에 집중이 안돼요' '공부를 하기 싫어요'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는 나 자신이 한심해요'라는 말이다. 원하는 고등학교, 대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공부를 해야 하는데 뜻대로 되지 않는 자신을 탓하고 있다. 한창 건강한 줄기를 뻗어 올려야 할 시기에 잔뜩 쪼그라든 모습이 힘없이 시들어져 가는 나무처럼 보인다. 내적인 동기는 온데간데없고 외적인 동기만이 표적이 된 이유가 아닐까. 어른들은 어린 자녀들을 자꾸 서열화시켜서 줄을 세운다. 1등부터 100등까지 줄지어놓고 몇 등인지에만 관심이 크다. 몇 등했는지, 몇 점 받았는지만 중요할 뿐, 아이가 무엇을 하며 행복한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아니,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내적인 동기가 있어서 잘하고 있는데 갑자기 외부에서 보상이 생기면 내적인 동기가 사라지는 경우도 있다. 열심히 공부하려고 마음먹었는데 '이번에 1등 하면 엄마가 네가 원하는 거 사줄게'라고 조건을 갖다 붙이는 경우다. 내적 동기가 침범당하면 어느새 하려던 공부는 해내야 하는 숙제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오랫동안 유지되기 힘들다.


서열화가 되기 시작하면 무조건 뒤따라 오는 것이 열등감은 따라온다. 1등은 단 한 명에게만 주어지기 때문에 1등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모두 열등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1등 한 사람은 어떨까? 마냥 기뻐할까? 아니다. 1등 한 사람도 자신이 1등을 놓치게 될까봐 전전긍긍하며 불안에 떨게 된다. 결국 1등부터 100등까지 모두 열등감에 시달리며 만족을 모르는 삶이 되고 만다.


대학생 상담을 하다 보면 팀별 과제를 하다가 스트레스받았던 경험이 종종 등장한다. 학기 중에 하게 되는 과제 중에 유난히 팀별 과제가 싫다는 것이다. 팀원 누구누구 때문에 팀 점수가 잘 안 나오게 되면 성적에 영향을 미치고 '저 애 때문에 내가 받아야 할 점수를 못 받았어'라는 생각에 원망감이 커진다. 열심히 하는 팀원도, 대충 참여자 역할만 하는 팀원도 불만이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저 애는 열심히 하지도 않고 점수를 거저먹으려고 하네'라는 생각에 팀원들에 대한 미움이 커지기도 하고 미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팀별 과제를 하는 취지는 그런 게 아니다. 같이 협력해서 다양한 아이디어를 모아서 하나로 완성물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통합과 협력을 경험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성적이 목적이 되는 마당에 협력 따위는 중요치 않게 된다. 그러니 서로 경쟁하고, 서로를 견제하고, 눈치를 보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아기가 태어나면 부모들은 '너는 태어난 그 순간부터 우리들의 선물이야'라고 감탄한다. 아이가 점점 자라게 되면서는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며 아이들의 미래를 규정짓기 시작한다. 너는 이런 아이가 되어야 해. 너는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해. 너는 이런 직업을 가져야 해라고 하며 아이 자체에 대한 존중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늘 다른 사람보다 잘나야 한다는 사고방식에 주입된 아이들은 성장하면서부터 타인을 협력적 대상이 아니라 경쟁적 대상으로 인식한다. 등급을 매기는데 익숙 해저 버린 삶이 어떠할지 상상해 보라.


'가슴이 뛰는 일을 하라'라는 말이 명언이라는 것쯤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저 명언으로 남을 뿐 그러한 삶을 실천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한 삶은 경제력도 어느 정도 만들어놓은 사람들의 전유물쯤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적 동기를 높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관계에 대한 부분이다. 내가 원하는 사람들 속에 함께 있고 내가 그들로부터 인정받고 환영받는 존재가 되는 느낌은 내적 동기를 불러일으키는 데 있어서 소중한 마중물이 된다.


외적 동기로 채워진 삶은 오래가지 못하고 에너지가 고갈된다. 열정적으로 살다가도 갑자기 '내가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이렇게 사는 것이 맞나'라는 허탈감과 공허함이 밀려오는 것도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누군가가 시키는 일을 억지로 하고, 원하는 순위에 들기 위해 공부를 하고, 남들보다 더 나은 그 무엇을 보여줘야 하기 때문에 이를 악물고 사는 삶이 어찌 고단하지 않겠는가.


성적을 잘 받아서 칭찬받는 것이 아니고, 외모가 좋아서 관심받는 것이 아니고, 돈을 많이 벌어서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존재만으로도 존중받아 마땅하다. 자연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산에 다양한 나무와 식물들이 있다. 그 식물들에게 과연 '너는 가장 잘 만들어진 나무야'라고 말할 수 있는가. '너는 가장 잘 완성된 꽃이야'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자연은 그저 그 자체로 존재하고 사랑받는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라고 인정하면서 끊임없이 서열화시키는 이유는 무엇인가.


다양한 연령층에서 '나는 도대체 뭘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어요'라고 호소한다. 무엇 때문일까 생각해보면 내가 뭘 잘하면 좋은지, 기쁜지, 설레는지에 대한 경험이 없어서일 수도 있다. 아니면 그런 것들이 중요하다는 사실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고, 이미 어릴 적부터 주입된 사고가 진실인 양 살아왔을 수도 있다. 살다 보니 '이게 아닌 거 같은데' '이렇게 살면 안 될 거 같은데'라는 의심이 고개를 들 때쯤이면 자신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보라는 신호이다.


'내가 가진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앎이 없이 '내게 없는 것이 무엇인지'에만 집중하고 있지는 않는가. 내가 가진 것으로 살아가고 내가 가진 것으로 세상에 도움을 주기에 충분한데도, 내게 없는 것에만 관심 있는 삶의 걸음을 잠시 멈춰보면 어떨까. 내가 가치 있는 사람이고 내게 있는 것들이 충분히 좋은 것들이 많다고 여기는 사람은 당연히 내적 동기가 넘쳐날 수밖에 없다. 결국 이러한 내적 동기는 한 시간을 빛나게 하고, 하루를 빛나게 하고, 한 해를 빛나게 하여, 결국은 '한 삶'을 빛나게 할 것이다. 수명이 늘어 100년을 살게 될 날이 머지않았다고 말하고 더 길면 120년을 산다는 말이 나오는 요즘이다. 그 오랜 시간 동안 '~ 가 되어야 한다'는 성공만을 위해서 살아간다면 얼마나 숨이 막히는 삶이 될지 상상해보라.


외적 동기에 대한 약점 중에 하나는 중독성이다. 무언가를 했을 때 얻어지는 칭찬이나 보상은 그 행위를 강화시킨다. 강화로 인해 좋은 결과를 얻어내는 데는 성공하지만 외적인 보상이 사라지면 그 결과는 힘없이 허물어진다는 데 허점이 있다. 긍정적인 강화물이 주어지지 않으면 그 무엇도 의미가 없어지고 지속성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결국에는 칭찬해주지 않는다고 투덜대거나 결과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게 되는 악순환의 연속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내적 동기를 회복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찾을 수 있을까. 대학생 지영 씨는 지난 학기에 휴학을 했다. 지영 씨 말고도 한 학기 또는 일 년을 휴학하는 학생들도 적지 않다. 그 이유를 물어보면 '다양한 경험을 하기 위해'라고 한다. 다양한 경험이 왜 중요한지 물어보면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게 됨으로써 진로를 결정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좋은 대학 입학을 위해 초, 중, 고 시절에 힘들게 공부를 해서 결국 대학에 와서야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는 격이다. 경험은 언제나 환영받을만한 일이다. 아쉬운 점은 좀 더 일찍 그러한 경험과 성찰이 있었다면 좋았겠다는 생각이다. 전속력으로 앞, 뒤, 옆 안 가리고 달려서 목적지에 도착해서는 '여기가 아닌가 봐'라며 난감해하는 모습이 안타까워 보여서 하는 말이니 오해 없기를 바란다.


어린아이들이 순수한 이유는 '이게 좋아' '저게 좋아' '이거 싫어' '저거 싫어'라는 것들이 확실해서이다. 순수한 아이들이 '이건 이래서 안돼' '저건 저래서 안돼'라는 사고방식이 학습되면서부터는 순수성은 사라진다. 아이들 스스로 '나는 이걸 좋아하는구나'라는 것들을 알아가게 그대로 둔다면 스스로의 삶을 책임지는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을 텐데 어른들의 불안이 아이들의 순수성을 빼앗아가는 건 아닐까. 그러나 이제라도 괜찮다. 부모라면 자녀가 '저 이거 하고 싶어요'라고 말할 기회를 주고 경험할 기회를 주면 된다. 이미 다 자란 어른이라면 '나 이거 진짜 좋아했었는데'라는 것들을 다시 소환해서 실천하면 된다. 좋아하는 게 없어서 고민이라면 사소한 경험이라도 이것저것 해보면서 찾아가면 좋겠다.


어떤 것들이 의미 있는지, 어떤 것들을 하면 기분이 좋은지에 대한 내적 동기를 찾기를 바란다. 내적 동기가 있는 것들을 하기 시작할 때 자신에 대한 앎이 시작된다. 피아노 연주자가 꿈이었던 서연씨는 어릴 때부터 피아노 연주에 소질이 있다고 생각했다. 피아노 연주자가 되기 위해 열심히 연습하며 실력을 다졌던 10여 년이 있었다. 결국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진로는 피아노 연주자가 아님을 알고 최근에 진로를 바꾸게 되었다. 그렇다면 서연씨의 10여 년 시간이 낭비된 것일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 10여 년 동안 당신은 자신을 알아갈 시간을 보낸 것일 테니 말이다.


잘 모르겠다면 '잘 모르겠음'으로 시작해도 충분하다. 끊임없이 주변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뿐이다. 내가 무엇을 할 때 기분 좋은지, 무엇을 할 때 행복한지, 무엇을 할 때 좀 더 내가 살아있음을 알겠는지 하나씩 그 느낌을 회복하면 좋겠다. 느낌이 쌓여 앎이 되고 그 앎으로 인해 자신의 삶을 충분히 잘 살아갈 수 있으니 걱정은 잠시 문 밖에 두어도 좋다. 왜냐하면 나 자신에 대한 알아차림은 의미 있는 삶에 대한 내적 동기로서 충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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