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과 나 사이
생각해보니 유난히 외자를 좋아했던 거 같다. 어릴 때 딸아이가 처음으로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 이런저런 단어카드를 놓고 놀다가 어느 날 '소'라는 단어카드를 집어 들고 '소'라며 발음을 내는 데 성공했을 때 무척 기뻤더랬다. '와 우리 딸 대단하다'라며 흥분하며 딸아이를 안고 부산을 떨었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오버하는 엄마였으리라. 이름 통성명을 할 때도 외자의 이름을 가진 분들을 보면 은근히 멋지다는 생각을 했었다. 보통 이름이 성을 합하여 세 글자로 이뤄지는데 외자를 가진 분들은 성을 빼면 딱 한 글자로 이뤄진 터라 더욱더 신기하게 보였던 거 같다. 짧고 간결한 단어를 좋아하다 보니 외자에 대한 매력에 빠졌다. 짧게 끝나버리면 그 짧음에 연결하여 무언가를 붙여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내가 좋아하는 단어 중에 '틈'이라는 단어가 있다. 틈이라는 단어를 허공에 띄워놓고 이리도 보고 저리도 보며 신나 한다. 사람들은 가끔 '틈'이라는 단어를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틈이 있으면,
허점이 보인다.
부족하다.
만족스럽지 못하다.
인정받지 못한다.
못나 보인다.
틈을 메우기 위해 뭔가를 덕지덕지 바르는 사람들은 삶이 무겁다. 마음이 분주하다. 눈치 보느라 불안하다. 틈을 메운다는 거 자체가 어쩌면 자연스러움에 반하는 행위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틈을 보이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완벽해 보였던 사람에게서 허점이 보이고, 약한 모습이 포착이 되면 오히려 다가가기 수월하다. '아 저 사람도 틈이 있구나. 그러니 나처럼 틈이 있는 사람도 잘 이해해 주겠지?'라는 생각이 들어서일까? 어쨌든 마음이 편안해지다 보니 상대방에게 다가감에 있어서 경계도 좀 풀고 마음도 좀 편하게 있을 수 있다.
나는 어린 시절에 시골에서 자랐다. 엄마가 밭에 씨를 뿌리고 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싹이 나기 시작한다. 이 모습을 보고 나서 엄마가 하는 작업이 있다. 빼곡히 새싹이 돋아난 모습을 확인한 후에 하나 둘 새싹들을 솎아내기 시작하는 것이다. 나는 어린 마음에 '왜 아까운 싹을 다 뽑지? 버려진 싹이 불쌍하게'라는 생각을 하며 내심 안타까워했더랬다. 그러나 엄마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다 죽어'라고 담담하게 말씀하시며 솎아내기 작업을 하셨다. 그 당시는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갔지만 솎아내기 작업이 끝난 이후에 그 새싹들은 더 튼튼하게 자랐다. 속도 알차게 들고 키도 부쩍 커갔다. 솎아낸 자리에 여백이 생기고 틈이 생겨서 공기도 잘 통하고 영양분도 충분히 섭취가 잘 되어서 그런 거라 했다. 그 말을 들으니 고개가 끄덕여졌다. 아깝다고 그대로 두었다면 새싹은 자라지 못하고 키도 크지 못하여 상품가치가 떨어졌을 게 뻔하다.
무엇이든 가까이 들여다보면 틈은 늘 존재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틈이 허락되지 않는다면 질식해서 숨이 막힐 것이 다. 연인관계에 있는 한 남자가 자신이 사랑하는 연인이 너무 애틋하여 가까이만 두려고 한다면 이내 그 연인은 답답함을 호소하다가 거리를 두려고 안간힘을 쓰게 된다. 그래야 살 수 있으니 자연스러운 이치다. 거리를 두지 않으면 둘 다 시들시들해진다. 사랑의 생명이 꺼지게 된다. 가까이 두려는 마음이 사랑의 방해물이 되는 것이다. 사랑할수록 그 사이에 바람이 통할 틈을 내어주어야 한다. 아낄수록 그 사이에 산소가 통할 틈을 내어주어야 한다.
빈틈없어 보이는 바위의 작은 틈을 자리 삼아 작은 식물, 작은 나무가 자라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어쩌면 이 작은 공간에서 생명을 띄웠을까'하는 마음에 자세히 들여다보게 된다. 자연도 틈을 필요로 한다. 틈 안에는 생명이 자라게 마련이다. 틈이 있어야 그 틈 안으로 소중한 것들이 담긴다.
상담사라는 직업을 가지다 보니 의도치 않게 '자신에게 있는 틈'으로 인해 힘들어하는 분들을 많이 만난다.
소심해서 힘들어요.
예민해서 힘들어요.
집중이 안돼서 힘들어요.
눈치가 없어서 힘들어요.
못하는 게 많아서 사람들이 싫어할 거 같아요.
수많은 틈을 내 앞에 꺼내놓고 틈을 메워달라는 눈빛을 보낸다.
틈은 누구에게나 있을만하니까 있는 것이다. 필요하니까 있는 것이다. 틈이 있었으니 이만큼 살아온 것이다. 틈이 있으니 그 틈을 비집고 더 좋은 것들이 찾아들 것이다. 틈에는 의외의 반전이 분명히 있다. 그게 바로 틈의 매력이다. 틈을 사랑스럽게 보는 것부터 시작해보자. 틈을 버리지 말고 품어보려고 해 보자. 틈을 숨기지 말고 드러내는 것부터 해보자. 나는 이런 면이 있는데 그래도 괜찮겠어요?라고 묻는 사람이라면 너무 사랑스러울 거 같다. 그렇다고 해서 지나친 자기애로 인해 거만하고 자만하는 말이 아님을 오해하지는 말자. 자신의 틈을 잘 알고 받아들이며 그 틈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그 틈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그 틈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관심을 가져볼 일이다.
틈은 버려야 할 대상이 아니라고 소리내어 말하고 싶다. 틈이 있는 자신이어서 감사해야 한다. 그 틈으로, 그 틈에서만이 잘 자랄 수 있는 최적의 씨앗이 찾아들 테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