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위행동
상담시간이 매 번 제시간에 시작된 적이 없는 내담자가 있다. 이유를 물어보면 집에서 나오려다가 잠깐 다른 일을 처리하느라 늦었거나 상담시간을 깜박했다는 이유가 많다. 상담시간을 제대로 지키는 것부터 상담 목표가 되는 예가 된다. 이런 경우의 사람들은 자주 잊는다. 까먹지 않으려고 노력함에도 소용이 없다. 약속을 까먹다가 지인들에게 신뢰감을 잃고 가양할 곳에 가지 못해서 스스로에게 손해를 입히기도 한다. 이러한 습관이 누적될수록 자신감은 낮아지고 무기력해진다.
심리학자들은 할 일을 자주 잊어버리는 경우를 해석하기를 의식적으로 신경을 쓰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기억력이 나쁜 사람이 아니란 이야기다. 꼭 처리해야 할 일이 있음에도 부담스러울 경우 억압함으로써 자신에게서 멀리 보내버리고 싶은 무의식이 작동한다. 의식적으로 생각만 해도 너무 압박감이 심해서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최근에 추수상담을 다시 시작한 여대생 J가 있다. (자신의 사례를 사용해도 좋다는 동의를 얻음) 그녀는 과거 중고등학교 시절에 전혀 공부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의 생각 속에는 '해서 뭐해, 어차피 안될 텐데'가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공부를 열심히 할 동기가 부족했다. 왜냐면 어차피 안될 건데 해야 할 이유는 당연히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망해버리자'라는 생각으로 아예 공부를 놔버리는 상황을 반복했다고 한다. 상담을 한동안 진행하고 나서 그녀가 느낀 건 '이전하고 다른 방법으로 해볼까?'라는 것이었다. 복학 후 시작한 학기부터는 공부를 열심히 하기 시작했고, 조별과제도 열심히 하기 시작했다. 일단 열심히 하기 시작한 것 자체가 그녀로서는 놀라운 시도였다. 중간중간 좌절이 올라올 때 나를 찾기는 했지만 단회성 상담이었고 1년 동안 3번 정도의 단회성 상담을 하면서 중간점검을 하면서 한 해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최근에 다시 추수상담을 지속적으로 시작한 이유는 좀 더 구체척인 전략을 세우고 실천하기를 원했기 때문인데 그녀의 열정은 1년의 과정 속에서 이미 좋은 성과를 이루었고 그 성과를 배가 되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진 자원들을 더 구체적으로 활용하고 약점들도 제대로 인식할 필요성이 부각되었기 때문이었다.
상: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왜 그렇게 자신을 '망하도록' 내버려 두었나요?
J: 공부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 시험이 다가오면 그 중압감을 견디기가 너무 힘들었어요. 그래서 그 상황에 머물 수가 없어서 그냥 망하자로 간 거 같아요.
그녀가 공부에 대한 중압감을 견디지 못하고 억압한 결과 자신을 포기하는 상황은 반복되었다.
억압은 병적은 것으로 간주되지는 않지만 의식적으로 처리하기 힘든 감정을 무의식으로 밀어내 버림으로써 정당성을 회복한다. 억압이 적절한 경우는 자기 보호 기능을 감당해주지만 심한 경우 자신과 대인관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다. 자신의 부정적 감정을 회피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을 놔두고 다른 일을 하는 경우가 있다. 나의 경우
- 보고서 작성 대신 청소하기(해야 할 일 보다 쉬운 일/ 그 당시에는 그 일을 먼저 해야 한다는 착각 속에 빠짐)
- 자료 정리 대신 은행업무 보기(당장 하지 않아도 되는 일)
이처럼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보류하고 다른 일에 매진하는 행동을 경험해본 이들이 적잖이 있을 것이다. 이를 '전위 행동'이라 한다. 2가지 상반된 충동이 갈등상태에 놓이게 될 때 전혀 다른 제3의 행동을 하는 것인데 동물의 예에서 찾아볼 수 있다. 두 마리의 닭이 서로 공격하고 싶은 마음과 서로를 향한 공포로 분열될 때 싸우거나 도망가지 않고 태연하게 먹이를 쪼아 먹거나 몸 단장을 하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신이 맡은 회사 내 프로젝트를 마감시간이 임박하자 그 일에 몰두하지 않고 지인들과 맛집을 찾아 돌아다니거나 쇼핑을 하는 제3의 행동을 하는 것과 같다.
- 할 일, 감정처리를 하지 않고 잠을 미친 듯이 자진 않는지
- 드라마 정주행을 하진 않는지
- 해야 할 일을 미루고 여행 계획을 세운다든지
- 나 빼고 무슨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는 생각 속에 온라인(SNS) 세상에 오래 머물지는 않는지
자신에게 면죄부를 주는 행동이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 보는 시간이 되기 바란다. 여러 가지가 떠오르더라도 딱 한 가지만 선택해서 '하지 않을 권리'를 행사해보자. 그렇다면 당신 앞의 문 하나를 열 열쇠 하나를 얻는 셈이다.